백호랑이와 푸르뎅뎅한 창귀 셋은 담에서 내려와 무덤으로 세워둔 화려한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오색찬란한 띠를 방 여기저기에 두르고 도배장판도 깨끗한 것이 마치 누군가가 어제까지 살림하며 살던 것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아주 부자이거나 권력가의 무덤인 게 분명했다.
제단 위로 홀라당 뛰어오른 호랑이. 그는 정성스럽게 올린 신주와 제기들을 앞발로 매정하게 차버린 후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퍽 주저앉았다. 그리고 마음속에 담아놓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화가 나고 불만스러운지 두 눈꼬리가 찍 올라가고 수염은 팽팽히 세워져 있었다.
"너희가 말한 자가 바로 저놈이었더냐? 근데 밥맛 떨어지게 왜 저리 꼬깃꼬깃 때가 끼고 구질구질한 것이냐?”
아직도 인간 세상에 약간의 연민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전직 사냥꾼이었던 창귀 이올이 한탄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조선에서부터 여기까지 몇 달간 달려왔으니 그 몰골이 오죽하겠나이까? 제대로 씻지도 입지도 못했을 터, 저 정도면 양반입니다요. 그래도 저놈이 그 무리 중 가장 상태가 좋지 않습니까? 말을 앞뒤로 모는 하인들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더럽고 거의 산도깨비 수준이더이다.”
“그 끔찍한 것들은 한 사발을 내 입 앞에 대령해 놓아도 비위가 상해 먹지 못할 것이니라. 안 그러냐?”
말을 마친 호랑이가 체면을 차리는 듯 몸을 반듯이 세우고 거만한 표정으로 아래 창귀들을 내려다보았다. 굴각이 넙죽 엎드리며 “예이 예이~”유난스레 높은 콧소리로 응답했다. 그 모양새가 하도 촐랑대기에 호랑이는 인상을 찌푸리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넌 전생에 저 밑바닥 하인이었다는 걸 아주 숨길 수가 없구나. 그만하란 말이야, 이 천한 종놈아.”
그러자 굴각이 고개를 바짝 숙이고 납작한 몸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그나마 그중 살아생전 글공부를 한 적 있는, 가장 최근에 그에게 잡아먹혀 창귀가 된 육혼이 점잖게 읍을 하며 아뢴다.
“사실 제가 박지원에 대해 잘 알고 있지요. 기회를 봐서 한번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범님께서 들으시면 아주 흐뭇하실 겁니다.”
“지금 아뢰어라. 내가 저 놈에 대해 더 듣고자 한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 본 적이 없어 사리사욕을 탐한 적 없고, 집안 대대로 청렴을 가문의 영광으로 삼아 ‘가난’이란 반찬이 떨어진 적이 없어 기름진 음식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다 하옵니다. 대신 하루 종일 제자백가나 시경, 춘추, 논어, 아름다운 시조들을 줄줄이 외우며 밥 대신 먹고 살아왔으니 그 살코기에서 좋은 향내가 나고 풍미가 매우 담백할 것으로 여겨지옵니다. 비록 조선의 왕과 그 무리가 그자를 원흉처럼 여겨 죽도록 미워한다고 하나 한 번도 왕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은 채 나랏님이 바른 길로 가시도록 마음 깊이 충심을 다하고 있답니다. 백성들을 향한 애정 또한 그 누구보다도 뜨거워서 그들의 이용후생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신분제 혁파와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상공업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북학파의 선대장 역할을 맡고 있다 하옵니다. 친구들과의 교우도 돈독하니 그 의로운 절개와 인간미가 참으로 귀하다 사료되옵니다.
그러니 저자야말로 님께서 그렇게도 찾으시던 고귀하면서도 깨끗한 먹잇감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물 건너 외국에서 들여온 흔치 않은 최상품입니다.”
“듣기만 해도 참으로 좋도다. 근데 너는 어찌 저 놈에 대해 그리 상세히 아는 것이냐?”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튼 최상급 살코기라 감히 명하겠나이다.”
“그래. 내가 잡아먹을 놈이 그 정도는 되어야지. 너희 셋이야 내가 지하에서 도망쳐 나와 하도 굶주려 그런 걸 미처 세세히 따지지 못했으나 이젠 배도 좀 부른 상황이니 좋은 걸 가려 먹을 것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만든다’라는 말도 있지 않다더냐?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그 선비도 목욕재계만 하면 그런대로 보기 괜찮을 거야. 허우대는 꽤 좋으니까.”
“예이 예이~”
굴각이 말끝을 길게 이으며 다시 호들갑을 피웠지만 기분이 좋아진 호랑이는 이번엔 그냥 놔두었다. 향기로운 향내가 나는 담백한 살코기를 떠올리며 그는 그놈을 꼭 잡아먹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짐짓 무서운 얼굴을 지어 보이며 그들에게 호령하였다.
“놈을 잘 감시하다가 혼자 떨어질 때 재빨리 나에게 알리도록 하라. 그리고 우린 연경으로 간다.”
“물고기가 많아야 그물을 쳐도 꽤 잡히는 법이지만 구태여 그리 복잡한 데를 들어가셔야 하겠습니까? 혹시나 들키기라도 하면 그런 곳에서는 뼈도 못 추리는데요. 더군다나 연경이란 곳엔 동물들을 가두는 감옥이 있다 하옵니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야 나온다는 일명 ‘남해자 동물원’이라 하더이다.”
사냥꾼이었었던 이올이 안 그래도 흉터투성이인 면상이 더욱 흉악해 보이게 눈썹을 찌푸리며 답하자 굴각이 호들갑스럽게 그 말을 이어받았다.
“아이고, 범님. 제가 듣기론 황제의 마구간 뒤로 ‘범의 우리’가 있다고 하며 황제가 범들을 제 마음대로 부린다 하옵니다. 굶겨 죽인 수도 꽤 된다고 하옵니다. 범님은 더군다나 귀한 백범이시니 한번 눈에 띄면 군사들에게 잡혀 끌려갈 수도 있사옵니다. 아잉, 생각만 해도 오싹하옵니다. 아잉~”
호랑이는 그런 것쯤이야 라며 비웃는 눈초리로 그들을 놀리듯이 호통을 쳤다.
“이 잡스런 귀신들아,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리 향한다 말했겠느냐? 다 생각이 있느니라. 하긴, 내 이 깊은 뜻을 어찌 너희 같은 미물이 털끝만큼이나 알아차릴 수 있겠어. 연경에서 누군가와 만날 약속이 되어있다. 이제 나도 슬슬 몸을 풀고 대의(大義)에 동참할 때가 되었어. 어두운 지하에서 너무 오랫동안 썩혀있었다. 너희들은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창귀들이 주인 앞에 바짝 엎드려 절을 했다. 호랑이는 청렴결백한 선비의 질 좋은 살코기 맛을 상상으로 음미하며 다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장차 유명해질 자신의 명성을 떠올리니 너무나 기뻐서 꺽꺽 웃기 시작하였다. 흡사 우렁찬 울음소리처럼도 들리었다. 귀신들 역시 흐느끼는 듯 이상야릇하게 낄낄거렸다.
사당에서 새어 나온 이 기괴한 소리에 마침 그 옆 담을 지나치던 짐꾼과 말이 화들짝 놀라 헐레벌떡 그곳에서 도망쳤다. 훤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감히 그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그 괴상한 소음은 몇 분간 지속되다가 갑자기 뚝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