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은 계단을 올라 드디어 신전에 다다랐다. 바람이 지나다니도록 뻥 뚫린 넓은 공간에 천장이 높게 올라간 회랑이었다. 그 한가운데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심각하게 토론을 펼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끝이 천장을 가리키고 있는 뾰족한 고깔모자와 로브를 입고 허연 수염이 달린 마법사들,
머리에 갓을 쓰고 동양적인 비단 의상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빵모자를 쓰고 토끼처럼 긴 귀를 가진 키가 작은 스위티니아 요정들과
그녀는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난쟁이 딥언더니아인도 함께 자리해 있었다.
그녀는 이들 모두가 ‘브라잇 동맹’에서 왔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거의 이 당시에 뱀파니아는 동맹이 아니었기에 뱀파이어로 보이는 자는 없었다.
지원은 태어나서 처음 목격한 서구인과 요정, 난쟁이들에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침착한 얼굴을 되찾았다. 다가온 신부가 그를 데리고 무리의 가장자리로 가서 어정쩡하게 선 채 토론에 빈틈이 생기기를, 그래서 끼어 들어갈 여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뒤에 서 있는 그와 지원을 거들떠보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수진도 지원 옆에서 한참 뜨거워지는 토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제가 아까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제묘 근처의 동악묘가 열렸다고요. 완전 뚜껑이 터져나가서 지하로 구멍이 뻥 뚫려있었단 말입니다! 뻥이요!”
남색 갓을 쓰고 보라색 비단 의상을 차려입은 한 사나이가 나막신 신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맞은편에 서 있는 연두색 고깔모자와 같은 색깔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느긋한 표정으로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맞받아쳤다.
“중국에 동악묘가 뭐 한두 개입니까? 그 많은 것들 중 하나가 열렸다고 당장 무슨 큰일이 나겠냔 말입니다. 허허.”
“어허, 그렇게만 보시면 곤란하지요. 거기서 나온 것들이 또 다른 묘로 가서 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손 놓고 있을 일은 아닌 것 같소이다만.”
파란색 앞치마를 두르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스위티니아 출신의 남자요정이 파란 눈동자를 굴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의 뺨과 모자, 앞치마에는 하얀 밀가루와 화이트 초콜릿 조각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겉으로야 동악묘의 수가 많지만 아래 지하로는 서로 연결이 되어있을지도 모르지요. 저 깊디깊은 땅속이 어찌 되어 있는지는 지하에 사는 저조차 전혀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은색 갑옷에 쇠도끼를 어깨에 두른 난쟁이 장군의 우락부락한 면상이 주위에 침을 튀겨가며 우렁차게 외쳤다. 암튼 이런 식으로 네가 맞네, 아니 내가 맞네 하며 각자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고 있었다. 말소리는 점점 커지고 시끄러워지는 가운데 의견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우왕좌왕 대던 바로 그때였다.
“모두 조용히 해보세요. 꽝~꽝~꽝.”
무리의 안쪽에 깊숙이 둘러싸여 있어 수진 일행에게는 보이지 않던 한 남자가 말을 마친 후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마법지팡이 끝을 천장으로 들어 올렸다. 그 끝에서 허연 불빛이 튀어나오더니 천장 구석에 매달린 쇠징을 꽝꽝 내리쳤다. 울려 퍼지는 징소리에 주변이 싸하게 조용해졌다. 그는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며 양해를 구하는 듯 한 손을 가슴 위에 얹고서 상체를 살짝 구부렸다. 하늘색 고깔모자와 하늘색 로브를 입은 그는 깨끗이 면도한 하얀 피부에 갈색 곱슬머리, 초록색의 깊은 눈동자를 가진 말쑥한 외모였다. 또한 여기 있는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젊어 보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원과 수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바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에게 다가왔다. 천주당 신부도 반가운 웃음을 띤 채 그를 맞으러 앞으로 나갔다. 신부가 작은 소리로 말을 전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는 그들을 그곳에 남겨둔 채 어딘가로 급히 뛰어갔다. 이방인들 사이에 남겨진 지원과 수진은 마치 자신들을 노리는 맹수 소굴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랐다. 앞의 젊은 마법사는 안심하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먼저 말을 건네었다. 그의 목소리에 호감이 어려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건넸는데 악수를 해 본 적 없는 지원은 그냥 바라볼 뿐 마주 잡지는 않았다.
“저희가 실례했습니다. 손님들이 오신 줄도 모르고. 저는 일룸니아 왕국에서 온 ‘와이즈맨’이라 합니다.”
수진이 화들짝 놀라더니 혼자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와이즈맨’이라면, 이안이 그렇게나 미워하는 철천지원수가 아닌가? 이안의 아버지인 메이슨 선왕을 배신하고 삼촌 제임스를 도와 ‘일룸니아 왕국’에 반란을 일으켰던 대마법사, 한때 이안을 가리키던 스승이기도 했다. 근데 지금은 200년 전이 아닌가? 어떻게 여기 과거에도 살아있을 수 있는 거지? 딥언더니아인의 평균수명이 200년을 넘으니 대마법사도 그렇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 것인가?
그러나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상상했던 것처럼 그가 그렇게 흉악한 나쁜 놈으로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매우 지적이고 용감하며 예의 바르고 선해보였다. 정말 호칭인 대마법사에 맞게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엄과 지성이 흘러넘치고 단단한 근육질의 건장한 체구에 힘도 세어 보였다.
그녀가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동안 지원은 그런 그에게 약간의 호감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그는 조선식으로 상체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가까이 다가서서 조심스레 질문을 퍼부었다.
“실례지만 제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지금 하도 정신이 없어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혹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하하, 그러실 만도 하지요. 처음 오시는 분은 다 그런 반응을 보이니까요. 여긴 연경의 서편 천주당과 연결되어 있는 <브라잇 동맹위원회 연경지부>입니다. ‘브라잇 동맹’이란 여기 모인 저희가 사는 세상이지요. 며칠 전 박 선생께서 일으킨 어떤 징조로 인해 이렇게 모셔오게 된 것입니다. 모시는 과정에 다소 무례한 점이 있었다면 매우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사실 그와 다른 동맹원들이 조선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서로 의사소통이 되고 있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수진은 담담히 받아들였지만 지원은 아까 중국인 신부에 이어 이럴 수가?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와이즈맨을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어서 눈을 내리깔라고, 어른을 그렇게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엄히 주의를 주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따르는 걸 지켜본 후에야 지원은 다시 물었다.
“제가 일으킨 어떤 징조라니 무슨 말씀이온지?”
“아, 마침 오고 있군요.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 급하게 자리를 떠났던 신부가 누군가를 데려오고 있었다. 키가 작고 갈색 승복을 입은 스님이었다. 수진은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지원은 보는 순간 바로 알아본 듯 손뼉을 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스님도 같이 달려와 그의 팔에 매달리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서로 오랫동안 생이별을 당한 가족 간처럼 보일 정도였다. 지원은 이런 이상한 곳에서 자기가 아는 사람을 만나 큰 위안이라도 얻은 듯 자신 있는 동작으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대환영했다.
“아니, 계주 독락사의 스님이 아니십니까? 저희를 안내하셨던. 여긴 어떻게...”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긴박하다 보니 이리 실례를 무릎 쓰고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무슨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지, 혹 몽고군이라도 청나라에 쳐들어 왔답니까?”
지원의 질문에 스님뿐 아니라 신부, 와이즈맨, 다른 모두가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어대었다. 안타깝게도 지원과 수진만 웃지 못하고 있었다. 웃음을 멈춘 스님이 목을 살짝 끄덕여 실례했다는 예의를 표한 후 입을 열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바로 선생이 보셨던 이태백 말입니다. 관음지각에서 술 취해 누워있는 이태백이라고 제가 소개한 그 와불 말입니다. 선생이 지나가신 후 와불이 눈을 떴습니다. 그전엔 감겨 있었는데 눈동자가 드러났어요. 저도 처음 봤습니다.”
“에잇, 지금 절 갖고 놀리시는 겁니까? 제가 볼 적에도 분명 눈을 감고 있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오. 분명 눈을 떴습니다. 여기 계신 와이즈맨과 다른 분도 직접 목격하셨습니다.”
지원은 정상인을 만나 이제 이곳을 좀 벗어나겠거니 기대했었었다. 그런데 정작 그가 더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혹 나와 수진이 홀려서 미치광이 소굴로 따라온 게 아닐까?’
그놈의 주체 못 할 호기심 때문에 신부를 따라온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되는 그였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겠다 결심하고 냉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화가 많이 난 목소리로 그가 스님에게 쏘아붙였다.
“이태백이 눈을 떴건 감았건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씀이오? 죄송하지만 저흰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수진아, 어서 가자.”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지원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거의 회랑 끝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무시무시한 느낌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 충격으로 건물의 대리석 기둥과 천장이 휘청거리고 바닥이 넘실대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은 안 되겠구나. 플라잉이글드래곤, 주위에 벽을 쳐라! 개미새끼도 못 지나가게 막아!”
와이즈맨이 외치자 지원과 수진의 발 앞에서 대리석이 덩굴처럼 뻗어 나오더니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곧바로 줄기들이 서로 엉켜 두껍게 단단해지고 회랑의 뻥 뚫렸던 사방을 단단한 벽처럼 휘감으며 둘러쌌다. 은은하게 기둥 사이로 비쳐 들어오던 마지막 황혼의 한 자락도 완전히 차단된 채 시커먼 암흑만이 주위에 가득 들어찼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고 반짝반짝 안광들이 보이는 가운데 문득 빛나는 투명공이 허공에 불쑥 등장했다. 아까 와이즈맨의 손에 들렸던 지팡이 끝에 올려진 빛의 덩어리였다.
그런데 지팡이 혼자 서 있을 뿐 옆에 아무도 없었다. 대신 징그러운 발톱이 달린 커다란 파충류 발이 비칠 뿐이었다. 모두가 깜짝 놀라 시선을 들어 올렸다. 놀랍게도 거의 신전의 천장 아래까지 닿을 정도로 거대한 하늘색 드래곤이 지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 그것은 하늘색 수사슴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다시 와이즈맨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