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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표시형 Dec 3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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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해가 넘어간다.

내년이면 서른 셋이 된다. 

세살, 열 세살, 스물 세살, 서른 세살 

걷고, 말하고, 뭔갈 다짐하고, 그리고 지금이 되었다. 

오늘은 잠깐이나마 함께 뜨거웠던 사람과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배불리 먹고, 일어나 각자의 침대로 향하는 길 눈이 왔다. 

'눈 오네요 시형님' 

그의 눈동자에 어떤 낭만이 서렸다. 

지나간 수많은 눈내리는 아름다웠던 날들이 왠지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는 듯 했다. 

난 잠시나마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고. 인사를 하고, 나의 침대를 향해 갔다. 

추운 겨울, 내쉬는 공기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뭔가 설레였던 시절이 있었다. 

추운날에는 내쉬는 숨결의 온기가 눈에 보여서 난 겨울이 좋다고 말했던 시절이 분명 내게도 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하며 집을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하늘을 찍고 있었다. 

장어집 앞의 관광객들도, 맥줏집 앞의 취객들도 

반짝이는 트리 앞 커플도 하늘을 보며 뭔가 서린 눈동자로 하늘을 보거나 찍고 있었다. 

난 그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뭐라도 생각해야 하는데, 이런 차가운 공기에 따뜻한 눈송이가 하늘에 내리면 

적어도 떠오르는 사람이든 기억이든 있어야 하는데 

메마른 사막을 휘적 휘적 걷는 낙타처럼 난 걸었다. 

침대에 도착했다. 누웠다. 이상하게 공기가 침침한 기분이 들어서 

맥주를 샀다. 병맥주를 사봤다. 괜히 뚜껑을 벽돌로 뜯어 마셨다. 돌가루가 씹혔다. 

한잔 쭉 들이켰다. 건너면 창문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연거푸 담배 두대를 폈다. 

씨발. 혼잣말로 쌍욕을 한번 했다. 

걍 할말 없어서 혼자 한번 내뱉어봤다. 

그랬더니 글이 쓰고 싶었다. 둘다 내겐 후련함이다. 

욕, 글, 담배 내겐 다 똑같다. 

서린 눈동자는 없어도, 도대체라도 뭔가 내뱉어내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돌가루 묻은 맥주를 퉤퉤 뱉어 가며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데, 눈이 내리는데 말이다. 

뭐라도 써야되니까, 연말이니까. 

이대로 침대에 누워 고요히 눈감고 잠들기에는 

아쉬우니까.

사실 요새 난, 도대체가 담담하다. 

지독한 우울증이 끝나고 나니 지독한 건조함이 찾아왔다. 

내 인생의 계절은 왜 중간이 없나.

마지막으로 좋았던 연말이 왜 기억이 나질 않고, 

어김없이 나는 혼자 일부러 나를 고립시키고 돌가루 묻은 맥주나 삼켜대고 있나. 

중2병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런 저런 고생을 할 대로 한 서른 셋인데. 

인생의 회환을 쓰라면 기억나지 않지만, 눈물 한방울 뚝 떨어지는 삶을 살았고 

그걸 설명하라면 그냥 침을 꿀꺽 삼키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난 올해가 지독하게 감사하다. 

작년에 비하면 

재작년에 비하면 

뭐 나아진 것 하나 없는 지금이지만 

난 지금 내 삶에 너무 감사하다. 

내년을 상상해본다. 

올해를 회고해본다. 

별 기억 떠오르지 않는다. 

몇가지 풍경들, 그때 느꼈던 감정들만 슬쩍 슬쩍 내비친다. 

올해 나를 스쳐간 사람들 모두 내년 지독히 안녕하기를 빈다. 

행복했으면 좋겠고, 노력 없는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표시형. 올 한해 살아내느라 고생 많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올 한해 살아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년, 어떤 다짐도 기대도 없이 

그대로 행운을 빌어봅니다. 

-돌가루 섞인 맥주를 마시며. (안취해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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