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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 in Wonderland Nov 08. 2020

[발번역] 1964 도쿄 블랙홀

프롤로그

1964 도쿄 블랙홀



저자 : 기시 켄스케

- 1957년생. 1981년 교토대 문학부 졸업 후 NHK 입사. 

- 디렉터로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다수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다 2017년 퇴직

-  주요 프로그램에 NHK 특집 '야마구치구미', 하이비전 특집 '웃는 오키나와, 백년의 이야기', NHK 스페셜 '아인슈타인 로망' '신·영상의 세기' 등


NHK 스페셜 [도쿄 블랙홀 II 파괴와 창조의 1964년]은 2019년 10월 13일 방송.


프롤로그_표백된 기억


 버블이 무너진 뒤, 미래를 향한 비전을 상실한 일본인은 활기가 넘쳤던 60년대를 뒤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쇼와 30년대 붐'이 일어나 미디어가 달려들어 향수를 자극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올림픽이 개최됐던 1964년(쇼와 39년)을 '꿈과 희망이 넘쳐흘렀던 해'로 그리워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밝은 한 해였던가. 


 만약 시간을 거슬러 56년 전의 도쿄로 다시 돌아간다면, 향수로 표백된 기억과 행복한 생각들은 아마도 순식간에 날아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에 얼얼한 현실의 손길, 불안과 갈등, 폭력과 모순이 가득한 세계가 나타나 전율을 느낄 것임에 틀림없다. 


 어떤 시대라도 인간은 꿈과 희망에 의지해 살아가려는 생물이지만, 그게 현실이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오히려 압박해 오는 생활과의 싸움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에 꿈과 희망에 기대려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아닌가. 그리고 당시의 아수라장을 살아내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시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1964년 도쿄의 기억에서는 그런 다채다양한 기억이 퇴색돼 있었다. 일단 올림픽이 다시 도쿄에서 개최되는 것이 결정되고 나서는 이 해를 둘러싼 신화가 다시 강화되어 누구라도 꿈과 희망을 안고 있던 황금시대였던 것처럼 말하게 되었다. 교묘한 선전에 올라타, 그런 유토피아가 정말 존재했던 것처럼 믿어버리는 젊은이들도 있다. 올림픽 개최는 연기됐지만 앞으로도 1964년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국민의 기억이라는 것이 틀에 박힌 기호 같은 것으로 변화해 밋밋해져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과거를 노스탈지아의 포장지로 감싸서 어딘가에 장식해 두는 것뿐이라면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죽음'이며, 보물을 갖고 있지만 그대로 썩히는 격이다.

 

 이 책의 출발점이 된 것은, NHK 스페셜 [도쿄 블랙홀 II, 파괴와 창조의 1964년]이라는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나는 프리랜서 영상 디렉터로 참가해 리서치, 구성, 각본, 드라마 연출, 그림 콘티, 특수촬영 영상의 감독을 담당했다. 그러나 아무리 흥미가 깊은 에피소드라고 해도 한껏 몰입한 이야기 모두를 한 시간의 영상 속에 채워넣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집한 영상과 문서의 내용을 좀 더 발전시켜서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강력한 소재는 국내외에 남아 있는 1만 편이 넘는 기록영상이다. 필름으로 각인된 영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다. 각각의 광경이 시간을 뛰어넘어 생각지도 못한 의미를 획득하면 1964년의 현실이 '망각의 바다'로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당시 도쿄에는 수세식 변소가 아직 보급되지 않아 열차의 화장실에서 오물이 선로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천만 명 분의 분뇨는 도쿄만(灣)으로 흘러들어갔다. 하천이라는 하천은 공장 폐수로 시커멓게 오염돼 수많은 물고기의 사체가 떠올랐고, 발암성 물질까지 발견됐다.

 

 도쿄는 세계 최대급의 오염도시였다. 유독가스, 미세먼지, 그리고 도민 천만 명의 쓰레기가 거리에 넘쳐났다. 파리, 모기, 쥐가 들끓었고 설사병과 장티푸스, 콜레라가 유행하는 전염병의 도시이기도 했다. 생활환경의 파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치돼 있었다. 


 교통사고의 사망률은 세계 1위.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을 확률은 세계 대도시 가운데 최악이었다.  인명 경시 풍조가 나날이 고조되고 있었다. 도쿄를 밑바닥에서 지탱하는 지방 출신 노동자가 매일 10명 이상 건설현장에서 추락해도 보상따위는 없었다. 


 빈곤과 격차가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베이비부머가 집단 취직을 통해 도쿄로 쇄도했다. 그들은 저임금, 장시간, 비정규 노동으로 착취당했다. 도시 집중으로 농촌은 붕괴하고, 여성들은 중노동으로 차례차례 쓰려졌다. 도쿄의 번영은 지방의 희생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팍팍한 가계를 이어가기 위해 피를 팔았다. 그러나 뽑은 혈액의 20%는 간염 바이러스에 걸려 있었다. 한편 혈액의 매매로 돈을 번 전범용의자의 인맥이 일본의 의료계에 복귀했다. 주택난도 최악이었는데, 목조 아파트의 4첩 반짜리 방에 일가족이 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집을 나가야 했다. 대단지 거주 당첨률은 3%를 넘지 않았다. 


 썩어가고 있던 것은 하천과 하늘 뿐만이 아니었다. 도쿄는 유례없는 비리 천국이었다. 1조 엔의 올림픽 머니를 먹이로 신칸센 공사, 올림픽 도로 공사에서 비리가 연달아 터졌다. 도쿄도청은 일본 최악의 부패관청이었다. 자민당 총선거에서 30억 엔이 뿌려져 한 사람당 1000만 엔으로 의원직이 공공연하게 팔려 나갔다. 우익의 거물이 자민당의 후원자가 됐다. 야쿠자는 18만 명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늘어나 확대된 자금원으로 정계에 개입했다. 소년범죄의 발생 건수가 전후 최고를 기록했다. 충동적인 살인과 폭력이 늘어났다. 중산층 가정의 소년이 엽기적인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름에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돼 도쿄는 미국의 출격기지가 됐다. 이 해에 미군기 17대가 추락해 많은 시민이 희생됐다. 


 올림픽은 냉전이라는 현실에 휘둘렸다. 공작원이 무대 뒤에서 암약했고, 북한과 인도네시아가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폐회식은 아랍 나라들과 이스라엘의 고집으로 파탄 직전까지 갔다. 올림픽이 한창 진행중일 때 중국이 핵실험을 강행했고, 이에 놀란 정부는 은밀하게 원전 추진을 검토했다. 


 성대한 잔치가 끝나고, 일본은 전후 최악의 심각한 불황을 맞이했다. 불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베트남 전쟁으로 뿌려진 막대한 달러 덕택이었다. 


 묻혀있던 영상에서 되살아난 것은, 번영의 그늘 속에서 다양한 모순으로 괴로워하고, 불안과 초조에 시달렸던 무수히 많은 삶이었다. 1964년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은 '망각의 바다'에 침몰해 있다. 우리들은 틀에 박힌 몇몇 이미지를 빼고 나면 이 해의 극적인 사건을 거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회에는, 의식적으로 잊혀져버린 공통의 기억이 있다"라고, 가즈오 이시구로는 지적한다. 이시구로는 인간 기억의 존재양식에 깊은 관심을 가진 노벨상 수상 작가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잊혀진 거인]은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2015년 6월, 일본의 독자들 앞에서 강연을 했다. 그때 이시구로는 개인과 사회의 기억에 대해 깊은 고찰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인간의 기억이란 왜곡돼 있습니다.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입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본심을 밝히지 않고, 꾸며서 이야기합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재능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기억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 끊임없이 반추한다. 거기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 맞지 않는 사실은 때때로 쓸모없는 잡동사니로 취급돼 언젠가 망각된다. 때로는 기억 자체가 조작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이든 사회든, 기억에 대한 망각의 체계는 동일하다고 이시구로는 생각한다.


 "독자는 거기서 진실을 '읽어내는 기술'을 배워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1964년의 도쿄를 둘러싼 '망각의 바다'가 있다면, 그곳에는 실로 방대한 기억이 침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에 파문을 남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난제는 과거에 기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것을 밝은 곳에 내놓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이시구로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대체 언제, 용기를 갖고, 어두운 기억을 밝은 공간에 꺼내놓을 것인가"에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 


 1964년에 대한 기억이 스테레오타입의 신화가 되어, 거기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퍼올릴 것이 없다고 생각된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들은 묻혀버린 사실을 '망각의 바다'로부터 끄집어내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에서 여러 경험이 가르쳐 주듯, 설령 어두운 기억, 통한스러운 실패라도 그것을 뇌리에 되살리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56년 전 기억의 유적에 묻혀버린 사실을 발굴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 매장품에서 진흙을 닦아내고, 빛을 비추어 과거의 감촉을 되살린다. 그리고 1964년의 기억에 엉겨붙은 신화라는 포장지를 벗겨내야 한다. 


 사람들은 어떤 시련에 직면하고, 고뇌하고, 전율했던 것일까. 잃어버린 기억에는 지금의 일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무언가가 들어 있다. 묻혀버린 사실 속에서 우리들이 가야할 곳을 비추는 힘을 가진 빛의 원천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선, 봉인된 기억을 풀어내 1964년의 리얼한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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