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민감자인 나는 분위기 파악이 아주 빠른 편이다.
‘이 사람과 저 사람, 조금씩 부딪히네. 둘이 갈등이 생길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면, 정말로 안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곤 한다. 나는 타이밍을 보다가 먼저 그 자리를 피하거나, 또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상황 속에 앉아있어야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내가 갈등을 정말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갈등 이전부터 생겨나는 긴장감과 불편한 분위기, 누군가의 기분 상한 듯한 표정, 미간이 찌푸려지는 순간, 작은 한숨들. 눈여겨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것들도 나는 쉽사리 눈치채곤 하니까. 이 모든 과정은 나에게 큰 스트레스가 된다. 오로지 나 혼자에게만 이 세상의 볼륨이 아주 크게 틀어져 있는 것만 같다.
지금의 신랑과 연애할 때도 나의 이러한 예민함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아있지 않아도 그의 피곤함이 전화를 통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신랑은 서울 염창동 부근에 살았고, 나는 경기도 남부 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9호선 급행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는데, 그가 늘 탔던 열차는 위에서 꽉꽉 눌러 납작해진 시루떡 같았다.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 포개지고, 뭉개져서 열차 안으로 들어갔는지, 신랑은 자신이 서 있을 공간을 겨우 만들어내느라고 매우 고생을 했다.
나는 그의 그런 고생스러움을 뻔히 알면서도, 동시에 전화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짜증스러움에 같이 속상하고 짜증이 났다.
"왜 그렇게 목소리가 안 좋아? 화나는 일 있어?"
라는 나의 말에 신랑은 때로 한숨을 쉬기도 했다.
"당연히 목소리가 안 좋지. 지금 숨 쉬기도 힘든데."
라고 아마 그는 대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피곤해서 그러니 집에 가서 전화하겠다'하고 현명하게 대처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마운 일이다.
지금의 내 신랑은 오히려 내가 예민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것은 일부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내 주변을 파악하고, 분위기를 감지하고, 타인을 예측하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하지만, 그 외의 일에는 굉장히 무덤덤하다. 집안이 어수선해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물건을 종종 잃어버리기도 하며, 중요한 일정을 깜박할 때도 있다.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해도 대체로 덤덤한 편이다. 나 자신에게도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실수나 행동에도 관대하다. 아마도 이런 무덤덤함은 나의 선택적 예민함 때문일 듯하다.
나의 예민함은 정말로 선택적이다. 나는 나의 생존에 관계있는 자극에 한해서만 예민하다. 생존에 관계있는 자극이란 바로 대인 관계적 자극이다. 물론 대인 관계가 실제로 생존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신경계는 여전히 대인 관계를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인식한다.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집단 사회를 한 번 떠올려보자. 이 사회에서 집단에서 소외되는 것은 곧 죽음으로 직결되는 일이었다. 인간의 유전자는 여전히 이 집단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나의 유전자는 특히 더 이러한 대인 관계적 신호에 민감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누군가의 표정 변화와 말투, 뉘앙스, 분위기 등을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하는 것은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내 유전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반면에 나의 생존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자극에 대해서 나는 별로 예민하지가 않다. 실수나 실패, 어수선한 물건들이나 작은 낙서들. 이러한 것들은 보기에 거슬리고, 불편하기 때문에 쉽게 예민해질 수도 있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대인 관계에서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버린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충전하듯이 지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나의 예민함을 아예 차단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잠시 스위치를 꺼두어야 그나마 에너지를 보존할 수 있고, 그 남은 에너지로 다시 사람들과 만나며 세상살이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택적으로 나의 예민함을 껐다가 켰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때로는 정말 깊이 있는 관계를 쌓아나가게 될 때가 있다. 누군가는 나의 예민함을 세심함으로, 진실됨으로 받아들인다.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는 일은 그 어떤 말로도 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
나의 예민함을 알아주는 누군가는 꼭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나는 얼마 전에 브루노 슐츠의 작품집을 읽었는데, 그의 아름답고 퇴폐적이면서도, 정교한 문장들을 보면서 그 역시 나와 같은 초민감자가 아니었을지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초민감자 중에서도 엄청난 슈퍼 초민감자였을지도.
"마치 태어나 자란 시골 마을로 돌아가는 농부가 길을 가면서 한 겹씩 도시의 우아한 옷차림을 벗어던지고 집이 가까워짐에 따라 시골의 낡은 곳으로 바꾸어 입는 것처럼, 거리는 이제 더 이상 도시의 겉치레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흑백 사진처럼, 혹은 싸구려 그림이 그려진 카탈로그처럼 회색이었다. 이런 유사성은 은유적이라기보다 현실적이었는데 왜냐하면 가끔 그곳을 돌아다닐 때면 실제로 설계 계획서를 넘기고 있는 듯한, 혹은 수상한 안내문이 의심스러운 공지 사항과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그림과 함께 사이사이에 기생충처럼 둥지를 틀고 있는 지루한 상업 광고의 칼럼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우리 눈앞에서 천천히 시들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의 인격이 몇 개로 분열되어 서로 반박하고 말다툼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러한 묘사가 가능한 걸까. 그의 문장 속 공간이나 사람들은 거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러한 아름다우면서도 압도적인 문장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그는 주변의 공간과 사람들, 계절과 행동들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슐츠가 정말로 hsp라거나 초민감자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의 문장들은 정말 깊고, 느리고, 상징적이며, 예민하다. 이 아름다운 문장들에 나는 위로를 받고, 그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아주 예민한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을지 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의 나는 매우 예민하다. 내 온 감각을 켜고 문장을 받아들인다. 나의 예민함은 사람들 앞에서처럼, 책 앞에서도 on이 되는 것 같다.
나는 선택적인 예민함을 지닌 초민감자다. 나의 이 선택적 예민함을 마음대로 켰다가 껐다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인 관계에서는 정말로 나의 예민함을 off 시켜버리고 싶지만 그것은 정말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다만, 예민하지 않은 척, 예민함을 off 해버린 척은 가능하다. 하지만 자꾸 그런 척을 했다가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나의 선택적 예민함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내 예민함을 마음껏 분출시킨다. 글을 쓰는 시간이 좋은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누가 뭐래도 상관없이, '나는 정말 예민하다!' 하고 아우성칠 수 있으므로.
나같이 선택적으로 예민한 누군가 있다면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마음껏 글을 써보라고, 마음속의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일기장이든 브런치든 뭐가 되었든, 글은 당신을 치유해 줄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