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은 어느 정도의 고통을 수반한다. 늘 잘 되는 일이란 없다. 때때로 나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상황이 흘러가서 엄청난 좌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인생 때문에 울적해질 때가 분명 있다.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만나는 사람들은 다 내 마음에 안 들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불안에 떨게 되기도 한다.
나의 인생에 도대체 행복이란 것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드는 날. 행복보다 고통이 몇 배는 더 크고 무겁게 느껴지는 그런 날. 이런 날에는 불안과 고통에서 헤어 나올 만한 방법이 하나 필요하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방법은 바로 철저하게 과학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다.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사실만 놓고 보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행복보다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 당연한 결과다. 우리의 유전자는 행복보다 고통과 위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적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통에 더 예민한 것은 부정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고, 고통이 실제로 더 많기 때문도 아니고, 오로지 이러한 유전적 경향 때문이다.
왜 우리의 유전자는 행복보다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까?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다. 행복은 생존에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고통은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이다.
고대 시대의 인류 한 명을 생각해 보자. 숲의 시원한 바람 소리는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그러나 바람 소리를 놓친다고 해서 그의 생존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뱀이나 곤충이 움직이는 소리는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 들 정도로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이 소리를 놓친다면 그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 독이 있는 뱀이나 곤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곧 그의 유전자는 바람 소리보다 뱀이나 곤충의 소리를 더 잘 듣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그의 후손에게 행복보다는 고통에 더 예민한 유전자를 물려줄 생각이다.
이와 같은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그리 거창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기계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 자체도 매우 가볍게 느껴진다.
하버드대학의 고생물학자 굴드는 그의 저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서 만일 우리가 지구의 역사를 담은 영화를 다시 돌린다고 할 때 마지막 장면에 우리 인간이 또다시 등장할 확률은 거의 영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한 종의 인간을 꽃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운 것도 아니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운 것도 아니다. 인간은 이 지극히 무계획적이고 무도덕적(amoral)이며 비효율적인 자연선택 과정의 우연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 최재천, <다윈 지능> 중에서
이렇게 보면 내 삶이 좀 무의미하더라도 뭐 어떤가 하는 마음이 든다. 어차피 우리 인류가 우연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우연한 탄생물인 나 역시 때로는 그저 공기처럼, 식물처럼 사는 것도 괜찮을 터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연한 결과물인 인류의 일부인 초민감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게 된 것일까.
초민감자들은 힘이 센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무리를 잘 이끌거나, 협력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그저 상대방의 감정을 세심하게 알아차릴 뿐이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누가 나를 불편해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하고, 사람들 간의 관계도 곧잘 눈치챈다.
이러한 능력은 얼핏 보기에는 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현 인류에게 남아 있는 성질들은 과거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선택되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초민감성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에서 초민감자의 민감성은 과도한 스트레스의 요인이 될 수도 있으나, 고대 환경에서는 오히려 생존에 유리했을 수도 있다. 나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고대 시대의 초민감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떠올려 본다.
먼저, 초민감자들은 누구보다도 위험을 빠르게 감지했을 것이다. 작은 소리와 냄새, 동물의 눈빛을 재빠르게 눈치채서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초민감자들의 이러한 감각 덕분에 무리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초민감자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셈이다.
둘째로, 초민감자들은 무리 사람들의 갈등을 조정해 주고 마음을 다독여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얼굴이나 표정, 감정, 분위기를 잘 읽어서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을 것도 같다. 어쩌면 고대 사회에서의 초민감자는 샤먼(영적 지도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훗.
셋째로, 촉이 발달해 있으므로 여러 상황에서 조언을 줬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누군가 낯선 열매를 먹으려고 한다면 '그건 먹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는 충고를 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 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저 사람의 말은 믿지 않는 게 좋겠어.'라고 말을 흘린다던가. 정보가 부족했던 옛사람들은 초민감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시대 사람들에게 초민감자는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이 예민함이 우리의 유전자에서 사라져 버렸을 테니까.
이처럼 과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때로 큰 도움이 된다. 초민감자인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하고 힘들까?'라는 질문에서 벗어나서 '나의 이 예민함은 무엇 때문에 존재했을까? 어디에서 온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통해 나의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단순히 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유전적으로 당연한 결과임을 깨닫고, 나의 존재 가치를 좀 더 다른 의미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진화의 산물인 나의 초민감성을 받아들이고, 그저 우연히 살아남은 나 자신을 감사히 돌아보며, 때로는 이처럼 무의미해도 괜찮다는 마음을 먹는 것.
그런 마음으로 며칠을 버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과학이 주는 의미는 충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