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늘은 매우 잔잔하다. 잔잔하다 못해 심심할 지경이다. 아이들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사람 한 명 만나지 않았다. 이런 날에는 더욱 열심히 글을 써야 하고, 집 안에서라도 더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서서히 소파가 되어버리거나, 침대가 되어버린다. 한 치의 움직임도 없는 부동의 가구처럼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다가 정말로 어느 날, 갑자기 딱딱한 가구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카프카의 <변신> 앞부분을 차용해 보자면 이런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마흔을 앞둔 한 여자는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나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이 평평한 침대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떨까, 가구로 변하게 된다면?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하고, 끔찍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가구로서의 삶을 점차 받아들이지 않을까.
가구의 삶이라는 건, 늘 제자리에 있는 삶이다. 집주인의 변덕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인생을 같은 자리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가족이나 손님들을 위해 제 한 몸을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되겠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앉히거나 눕혀서 쉬게 해주는 그런 가구라면, 나쁘지 않을 듯하다. 가구가 아니라면 기계라도 괜찮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난로라던가.
생텍쥐베리는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가끔씩 어머니는 위층에 올라와 방문을 열고 우리가 따뜻하게 자는지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난로가 전력을 다해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내려가셨지요. 저는 한 번도 그런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 우리에게는 몸이 아프다는 것이 놀라운 행운이었어요. 우리는 차례로 돌아가며 아프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감기가 주는 바다처럼 무한한 권리였지요. 어머니의 침실에도 힘차게 돌아가는 난로가 있었습니다. (..) 저는 어린 시절 이후로는 제가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 생텍쥐베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생텍쥐베리에게 어머니와 난로는 자신이 제대로 살아있음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난로와 함께 기억했다. 이러한 기억은 한 번 생기기만 하면, 우리의 피부에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아이들에게 생텍쥐베리의 난로 같은 기억을 남겨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가구나 기계, 아님 식물이나 그 어떤 것으로 변할지라도 괜찮을 것 같다.
가구로 사는 삶. 이러한 삶을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기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초민감자인 나는 의외로 외향적인 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면 에너지를 얻는다. 그래서 예전에는 집에 있기보다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더 많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나는 깊이 있는 관계를 선호한다는 점이다. 연예인이나 최신 뉴스, 날씨나 주식 등은 내가 좋아하는 주제가 아니다. 그런 것보다는 나는 상대방의 인생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이미 그의 인생 일부가 나에게 고스란히 들어왔으므로, 그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고 싶다.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무슨 삶을 추구하는지, 책이나 음악을 좋아하는지, 이런 묵직한 주제로 오래도록 얘기를 나누고 싶다.
이렇다 보니 스몰 토크나 가벼운 대화는 나에게 늘 어색하고 어려운 영역이다. 분명 말을 주고받기는 하는데, 서로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벼운 관계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를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들이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과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붙잡고 깊이 있는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초민감자는 매우 예민하여 상대방의 감정 및 분위기를 세심하게 파악한다. 내 앞의 사람이 무거움보다 가벼움을 추구하는 성향이라는 걸 나는 한눈에 알아차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의 무거움을 짊어지우기보다는, 그들의 가벼움에 동조하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와 같이 무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서로 자신의 페이지를 하나씩 열어 보인다. 그 과정에서 그의 인생이 내 안으로 깊이 스며든다. 그의 상처나 결핍을 나는 쓰다듬는다. 나의 결핍도 그에게 드러내 보인다. 인생이란 원래 이런 것임을, 누구나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음을 우리는 함께 깨닫는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따스한 난로가 되어줄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난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사물이어도 좋고, 영화나 책이어도 좋다. 어떤 책들은 우리 안에서 결코 꺼지지 않는 난로가 되어 영원한 열기를 내뿜는다. 나에게 난로는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나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같은 책들이 그렇다. 책 안에는 죽음과 절망, 공포와 좌절 등이 가득하지만, 그런 책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무의미한 삶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두툼한 종이 뭉치들이 나에게는 난로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난로를 잊어버린 채 살다가 어느 순간, 열기가 꼭 필요하게 될 때에 이것들을 기억해 낸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눈빛과 목소리, 서로의 결핍을 나누었던 길고 짧은 시간,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둔 책 속의 한 페이지. 난로를 꺼내어 중심에 가져다 두기만 해도, 우리의 삶은 좀 더 견딜 만 해진다.
오늘 나는 가구처럼 앉아서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소파에 앉아있으니 소파가 되었다고 하자. 소파가 된 나는 잔잔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렇게까지 내 삶이 잔잔해질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사람들이 투두둑 떨어져 나가고, 꼭 남아야 할 사람들만 남았다. 한결 가벼워진 인생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바쁘게 살라고 말한다. 인맥도 쌓고, 임장도 가고, 새벽 독서도 하고, 일기도 쓰라고.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여행도 많이 다니라고.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바쁘게 살면 세상은 너무나 소란스러워지고, 작은 틈 하나 용납하지 못 할 정도로 가득 차 버릴 것 같다.
바쁜 세상 속에서 나는 홀로 소파가 되고 있다. 소파가 된 나는 더 이상의 예민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간이 그냥 좋다. 어쩌면 조금만 더 있으면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 좋을 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