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이맘때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전에 말씀하시길, 당신의 시간은 화살처럼 내리꽂는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말이 허풍이 아닌 이유에는 과학적 증거도 있지만, 지금은 과학 시간이 아니기에 부연 설명은 생략해도 되겠지. 아무튼 요즘 나의 시간도 점점 빠르게 흘러간다.
아이들의 글쓰기/ 독서 지도 선생님으로 출근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말은 곧 월급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야호~! 더불어 한 달 동안 아이들과 수많은 일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기억력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글로 남기지 않으면 공중분해 되어 사라지고 만다. 순수한 영혼이 내겐 준 반짝이는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서, 나는 다시 노트북을 열고 자판 위에 손을 올린다.
나에겐 벌써? 라고 느껴지는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오랜 세월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의 시간은 언제나 어른의 시간에 비해 느리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금방 학원에 와놓고도 “선생님, 저 집에 가려면 몇 분 남았어요?”라고 묻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들이 내게 해 준 말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아이들과 수업한 지 일주일째 되던 무렵이었다. 학원에 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던 초등학교 2학년인 C가 내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월요일에 나와요?
-응
-화요일에는요?
-화요일에는 다른 지점으로 가.
-그럼 수요일에는요?
-수요일에는 여기로 오지.
-그럼 목요일은요? 금요일은요?
-그때도 여기로 와.
-그럼 토요일도 와요?
-아니~ 선생님은 토요일은 쉬어.
-전 선생님이 월, 화, 수, 목, 금, 토 맨날맨날 나오셨으면 좋겠어요!
C는 자기 친구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는, 다 푼 학습지 뒷면에 내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좀 보세요~ 마스크 쓴 거로 그려드릴까요~? 마스크 벗은 모습으로 그려드릴까요?
-C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
C는 뭔가 결정한 듯이 나와 눈을 맞추고, 요리조리 살피면서 더욱더 자세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기심 가득한 두 눈으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사리 같은 손끝으로 종이 위에 담아냈다. 마스크를 벗은 적이 없어 알 수 없었던 선생님의 하관까지, C는 자기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나를 표현했다.
순수하고 솔직한 아이들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참으로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때론 글로, 때론 말로, 때론 그림으로, 때론 노래로, 때론 몸짓으로 자기 생각과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이 작은 사람들은 종합 예술인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다른 아이들과 등원 시간이 한 번도 겹치지 않아서,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초등학교 2학년인 Y가 있었다. 외동인 Y는 집에서도 학원에서도 혼자인 게 심심했는지 몇 번이나 친구들이 많은 시간에 오고 싶다고 했다. (이곳은 아이 개개인의 자율 시간에 따라 등. 하원 한다) 그랬던 Y가 처음으로 여럿이서 같이 수업하고 나서는, 다른 아이들이 하원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다가와서 속삭이듯 말한다.
-선생님~ 학원에 저 혼자 있을 때 좋은 점도 있었어요~
-어떤 건데~?
-음~ 선생님의 관심을 저 혼자 받을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는 하원할 때 선물이라면서 내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언젠가 학원에서 단둘이 있을 때, Y가 방송 댄스를 배웠다면서 같이 노래를 부르며 춤춘 적이 있었다. 그런 Y의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선생님이 한 번 안아봐도 되겠냐고 묻고 꼭 안아주었다. 아이는 그때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하원 하는 Y를 불러 말했다. "가기 전에 선생님이랑 꼭 안아볼까?" 그러자 아이는 조금 전 서운한 마음이 다 풀렸는지 작은 두 팔로 힘껏 나를 안고는 배시시 웃는다.
살다 보면 때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사람과도 나눠야 할 때가 있다. 그날의 Y도 그것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