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는 요즈음 나에게 가장 많이 사과하는 사람이다. 그날도 조용히 다가와 사과했다.
-선생님…죄송해요.
-응~? 뭐가 죄송해?
-너무 많이 틀려서 죄송해요.
모르는 것을 배우러 온 초등 3학년이, 몰라서 틀린 것 때문에 선생님에게 사과하는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사과해야 한다면 아이를 잘 못 가르친 모든 어른들이 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게 아닌가?
내 기억으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모님에게 성적 때문에 혼나거나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우등생이어서 그랬……던 거라면 폼났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이유는 아니다.
단지, 우리 부모님은 학교 성적보다 인성 문제에 더 큰 무게중심을 두셨던 것뿐이다.
덕분에 학교 성적 때문에 혼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할 때는 디. 지. 게. 혼났다. 그러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처럼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오히려 내 손에 회초리를 쥐여주고는 자식 잘못 가르친 당신의 종아리를 때리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며 엉엉 울곤 했다.
처음 D가 내게 사과하던 날, 마치 엄마가 내 손에 회초리를 쥐여주는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D야~ 그게 왜 죄송해~ 그건 죄송한 게 아니야. 선생님도 어렸을 땐 이런 거 다 몰랐어.
-정말요?
-그럼~ 선생님은 지금도 모르는 게 많아서 배워. 배우면 알게 되거든.
나의 말을 듣고는 조금 안심한 것 같았다. 그러나 D의 학습지에 빨간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좁은 어깨를 둥글게 말고 다가와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혹시 D가 저러다가 둥글게 말린 공벌레가 되어 집까지 굴러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무엇이 이토록 작은 사람을 더욱더 작아지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D는 급기야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적기도 전에 학습지만 받으면 내게 들고 왔다.
-선생님... 이거 모르겠어요...
-D야. 선생님이 정답을 계속 말해주고 백 점을 받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그건 D가 푸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푸는 거잖아. 틀리더라도 D가 혼자 생각해보고, 그 답을 적어보고, 고쳐보는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린이와 대화할 때는 어른이 아는 정답을 떠먹여 주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자기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설령 정해진 답이 있는 문제일지라도 확실하게 틀리고 바르게 수정하는 경험 또한, 아이가 삶에서 배워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처럼 지속해서 쌓인 자기 경험을 통해 기억 속에 저장되고, 숙달되는 현상을 ‘학습 효과’라고 한다.
처음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옆에서 조용히 듣던 초등 2학년 B가, 갑자기 큰 목소리로 거들면서 자기 시험 점수를 보여주었다.
-선생님! 저도 형아가 읽은 책 시험 봤었는데, 그때 엄청 많이 틀렸어요~ 그 책이 어려워요. 이거 보세요!
-그렇구나~ 다른 책 보다 이 책 내용이 어려운가 보네.
그 순간 공벌레처럼 움츠려있던 D의 어깨가, 태권 V같이 활짝 펴졌다. 그러더니 "맞아요~! 이 책이 조금 어려워요."라면서 신나게 맞장구쳤다.
그동안 D는 2학년 아이들이 읽고 푸는 문제를 계속 틀렸던 게 창피하고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다음 레벨로 올라가는 것을 지금까지 스스로 미뤄온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D는 혼자서 생각하고 문제 푸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끔 “와~! 생각보다 쉽다.”라는 말을 외치면서, 전보다 자신 있고 당당하게 틀렸다. (웃음)
그러던 어느 날 D가 내 눈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착하신 것 같아요.
-내가 왜 착하다고 생각해~?
-저희를 쉬게 해 주시니까요.
수많은 세월 동안 내가 나에게 하듯 내 앞의 작은 사람에게도 그대로 해줬을 뿐인데, 그게 아이의 숨통을 트이게 해줬었나 보다.
부족한 자기에게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줄 때, 완벽하지 않은 타인에게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자기에게 해 온 태도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서 굳이 애쓰며 노력하지 않아도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아이들 독서 목록 중 비르지니 엘 삼의 <우리 반 일 등은 외계인>이라는 책이 있다. 지극히 평범하고 오히려 부족하기까지 한 자기와 달리, 완벽한 우리 반 일등이 알고 보니 진짜 외계인이라는 엄청난 반전이 있는 내용이다.
크리스퍼 놀란 감독도 놀라고 갈 SF 책을 읽은 초등 2학년 Y와 M이 아래와 같은 독후감을 썼다. (맞춤법이 미흡해도 아이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원문 그대로 옮깁니다)
제목 : 완벽하지 않으면 뭐 어때?
저는 이 친구랑 같은 경험을 한적이 있어요. 완벽하려다가 끝내지도 못했지요. 저는 만들기를 완벽히 해야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제가 만들기를 완벽히 하다가 끝내지 못할때 후회가 되었지요. 모든지 완벽히 해야되는 건 아니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할 순 없어요. 공부도 적당히 하고 완벽하지 않아도 돼요. 완벽하지 않으면 뭐어때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지만요. 그런데 스트레스를 주거나 힘들면 그만하는 게 좋아요. 아무리 공부해도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그럼 안녕히계세요~
-초등 2학년 Y의 독후감 중에서-
제목 :우리반 일등은 외계인
저는 일등이든 완벽하는 못하는 상관을 안합니다. 저는 제가 최선을 다 한것 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엄마가 말씀해 주셨는데 최선을 다 한 것과 그 시험을 보기 위해 연습한 것만으로도 엄마, 아빠가 칭찬해 주신다고 합니다. 시험을 잘보고 연습을 안 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초등 2학년 M의 독후감 중에서-
성경책을 읽어봐도 신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부족한 우리는 타인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서로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협력하는 방법을 터득할 때, 이것은 비로소 하늘 아래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함께 모여 책 읽고 글 쓰는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장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