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인 C가 등원하자마자 내 앞에서 가방을 내려놓더니 의미심장하게 묻는다.
-선생님 결혼하셨어요?
-아니~
C는 어쩌다가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하지 못(안) 했냐고 묻지 않았다. 혹시 성격이 이상하거나 어딘가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냐며,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는 무례함도 곁들이지 않았다. 또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게 부럽다며, 앞으로도 계속 쭈~욱 혼자 살라는 인생 조언을 가장한 저주도 걸지 않았다. (웃음)
그 대신 자신이 집에서부터 둘러매고 온 책가방에서, 전날 밤부터 챙겨 온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요리조리 살펴보니 앞면인지 뒷면인지 알 수 없는 한쪽에는 각각의 캐릭터와 함께 숫자, 특성, 약점, 저항력, 룰 등이 깨알처럼 적혀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는 반은 빨갛고 반은 하얀 둥근 공 위에 POKEMON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무적의 3대 카드란, 법카, 엄카, 티키타카뿐이었다. 그런데 포카라니? 태어나서 처음 보는 종이 카드를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써야 한다는 말인가? 분명히 작은 사람들이 가지고 노는 물건일 텐데, 내 친구들은 포카를 가지고 놀기엔 이미 너무 커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현실에 절망하고 있을 때, 나를 향해 C가 호기롭게 말했다.
-그럼 나중에 결혼하면 남편이랑 싸울 때 이거 내세요~ 얍얍! 이길 수 있어요. 쌤께 3장 드릴게요~!
마음 착한 나무꾼 앞에 갑자기 산신령이 펑! 하고 나타나서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를 주듯이 초등 2학년인 C는 총 3장의 포카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는 마치 미래의 승리를 예감하듯 역사적인 기념 샷에 손가락을 V 모양으로 펼쳐 보였다.
그날 나는 포카 3장을 고이 받아서 책 사이에 껴놓았다. 오! 책 사이에 싹 끼어드는 느낌이 좋군.
퇴근길, 왠지 느낌 좋은 포카 책갈피가 꽂힌 책을 꺼내,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읽기 시작했다. 갈아타는 구간이 될 때쯤 서둘러 책을 덮고 이동하려는 순간, 노약자석에서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외치셨다. “아가씨, 바닥에 뭐 떨어졌어~!”
그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퇴근길 모든 사람이 다 쳐다볼 지경이었다. 바닥을 보니 세상에! 포켓몬 카드 3장이 비에 젖은 낙엽처럼 지하철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포카 3형제를 손으로 하나하나 집어 올려, 책 사이에 꽉! 끼어 놓았다.
그렇게 포켓몬 카드의 본래 쓰임새를 잊고 있을 때쯤, C가 또다시 요술 가방을 둘러매고 등원했다. 우리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마스크 위로 아이의 두 눈은 더욱 반짝거렸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욱더 호기로운 기세로 내게 외쳤다.
아뿔싸! 그 순간, 한 아이에게서 받았던 팔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옛날 옛적에 키 작은 소녀가 수줍게 다가오더니, 늘 자기 손목에 차고 다니던 팔찌를 빼 내게 선물로 주었다.
나는 그 팔찌가 어떤 의미인지 모른 채, 받아서 내 손목으로 옮겨 차고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까 엄마가 팔찌를 보고서 어디서 났냐고 물었다.
-응, 어떤 아이가 자기 부모님이 선물해준 소중한 팔찐데, 내가 가지면 좋겠다면서 줬어.
-은영아. 이건 불교에서 차는 팔찌야. 친구에게는 소중한 물건일 텐데, 우리는 크리스천이라서 필요 없어. 내일 가서 친구에게 잘 말하고 돌려줘.
엄마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유치원에 도착해서 그 아이 앞에 다가가기까지, 7살 인생에서 가장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팔찌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염주를 돌려받은 7살 키 작은 소녀도 슬프긴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흘깃 쳐다봤을 때, 그 아이는 다른 친구의 곁에서 울고 있었다. 키 작은 옆에 있는 친구는 우주의 발란스를 맞추듯 또래보다 키가 컸는데, 그 둘은 항상 같이 다녔다. 그래서 내게 팔찌를 줄 때도 팔찌를 다시 돌려받을 때도 둘은 같이 있었다. 꺽다리 친구는 팔찌의 주인을 안아주며 위로하고 있었다.
그 뒤로 키 작은 소녀와는 친해지기도 전에 서먹해졌고 자연스레 멀어졌다. 팔찌 주인과 단짝인 꺽다리 친구까지 세트로 말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친구들이 점점 불편해졌고, 급기야 미운 감정까지 생겼다. 그것은 우리 셋의 종교가 달라서 생긴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 준 선물을 돌려받자, 자기 마음이 거절당했다고 오해하면서 생긴 비극이었다.
-C야~ 이거 선생님 다 주는 거야?
- 네에~! 제가 지난번에 약속했잖아요. 더 강력한 카드를 드리겠다고요.
사실 아이가 내게 그런 약속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다른 아이를 지도할 때 등 뒤에서 혼잣말로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이 됐든 작은 사람은 몇 날 며칠을 혼자 다짐하며, 선생님을 기쁘게 해 줄 생각 하나로, 이 많은 카드를 모아 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C의 친구 S가 말한다.
“와~! 저거 다 좋은 건데. 그리고 쌤! 비닐 안에 있는 건 엄청 비싼 거예요~”
비. 싼. 거. 예. 요.라는 음성이 들리는 순간 망설였다. 나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물건-유일하게 책갈피 용도로는 가능한 물건-이지만 아이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포카다. 그렇기에 무적의 포카가 필요한 사람이 갖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이제 포켓몬 카드는 단순히 누구에게 더 필요한 물건인가를 두고 논쟁할 수 있는 의미를 넘어섰다.
순수한 아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날 향한 아이의 정성을 세상 기쁘고 고맙게 받았다. 아이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폴짝폴짝 뛰면서 기뻐했다.
작은 사람은 전날 밤부터 어떤 마음으로 요술 가방 안에 포켓몬 카드를 넣어두었을까? 자신에게도 귀한 물건을 어떤 생각으로 나에게 선뜻 내어 줄 수 있었던 것일까?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꺼내, 기꺼이 상대에게 나눌 수 있는 마음과 그로 인해 상대방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것, 이것은 분명한 사랑이다.
부디 우리의 순수한 사랑이 김영란법에 걸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