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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Oct 04. 2022

줄임표 안에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담겨있다

 학원에서 처음 본 초등 2학년 H와 알 수 없는 기싸움이 시작됐다.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그래서 나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H야. 그럼 이제 학습지 풀자.    

-하기 싫은데요?

-하기 싫을 수 있지. 그럼 안 하고 넘어갈래?


예상치 못한 나의 반응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일부러 H를 당황하게 하기 위해 의도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건 나의 진심이었다. 언제나, 반드시, 기필코 학습지를 ‘꼭’ 풀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아이가 배움의 즐거움을 느껴서, 자기 주도 학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마침내 사색하는 또 다른 인간으로 키워내는 것이 선생님의 기본 역할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싱겁게도 H는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순순히 학습지를 받아 들고는 자기 자리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내게 다가와서 전보다 더욱 뾰족해진 말투로 찌르듯이 묻는다.


-10줄 꼭 써야 해요?

-아니~ H가 쓸 수 있을 만큼만 써.

-그럼 5줄만 써도 돼요?

-응~ 부담 갖지 말고 할 수 있을 만큼만 하자.

-그럼 3줄만 써도 돼요?

-3줄밖에 쓸 수 없으면 그래도 돼.


자신과 적대적 입장이 되지 않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H는 나를 자극할만한 말을 작은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고르더니 툭툭 던졌다.


-이거 답 쓰기 귀찮은데 그냥 점으로 찍어도 돼요?

-응? 점으로 답을 표현하겠다고?

-네~ 그냥 점을 막 찍어서 3줄 채울래요.


H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후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학습지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학습지에는 진짜로.............……………………………………………………………..이런 점이 엄청나게 찍혀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H의 행동에 놀라움을 넘어 감탄했다. 왜냐하면 나 같으면 귀찮아서도 그렇게 열심히 점을 찍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할 말이 어찌나 많은지 학습지에 줄임표를 수백 개 찍어 놓았다.


-와~! 점을 엄청 열심히 찍었네!

-흥~ 친구랑 같이했는데요?

-너네 협동도 하는구나!

-대충 한 거예요

-대충 한 거 맞아? 그런데 왜 이렇게 촘촘하게 잘했어? 다른 문제도 거의 다 풀었네!

-아니에요. 원래는 더 잘해요.

-그래?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최선을 다하면 도대체 얼마큼 잘한다는 거야? 다음에는 최선을 다해봐. 궁금하다.

-싫어요.

-뭐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단지, 선생님이 보기에 지금도 네가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니까. 만약 네가 최선을 다하면 얼마큼 잘하는지 궁금한 것뿐이야.


아이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뜬금없이 묻지도 않은 지난 시간에 탈락한 진단 평가 점수를 말했다. 이곳에선 아이가 등원하면 자기 레벨에 맞는 책을 스스로 골라서 읽고, 컴퓨터로 진단 평가까지 해야 한다.


진단 평가란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숨겨진 작가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했는지 객관식 문제를 통해 알아보는 과정이다. 한마디로 문해력을 키우는 훈련이다.

이 훈련은 하루에 2번만 할 수 있는데, 최종 점수가 70점 미만이면 다음에 등원해서 재진단 평가를 받아야 통과한다. 그렇게 진단 평가가 끝나면 자기 생각과 감정을 글로 쓰는 학습지를 푼다.

 

-저 50점 맞았어요.

-열심히 했어. 다음에 또 도전하고 더 잘하면 돼. 처음부터 어떻게 잘해.

-저 저번에는 한 번에 100점도 받았는데요?

-와~ 정말 잘하는구나.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에 H가 선생님 자리에 앉은 나에게 왜 그렇게 공격적이었는지, 말하지 않은 진실을 알 수 있었다.

H는 처음 본 선생님 앞에서 낮은 진단 평가 점수가 부끄럽고 속상했던 모양이었다. 또는 완벽한 점수를 받지 못할 때마다 자신에게 꾸준히 화가 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동안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점수를 지적하며 다시 해!라고 다그치는 어른에 대한 반항심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 할 때 침묵하거나, 그냥이라고 말한다. 입 밖으로 전하지 못한 이야기는 우리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고, 언젠가는 엉뚱한 순간에 엄한 사람에게 폭발하기 마련이다.


-선생님! 이건 70점 받고 또 했는데도 30점 받았어요. 어떻게 점수가 떨어질 수 있어요?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사람이 어떻게 매일 최선을 다하고 매일 잘해? AI도 아니고! 기계도 오류 나~


나의 대답이 H의 얼굴에 닿는 순간, 마치 조명을 비춘 듯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H는 약간 뻐기는 듯한 태도와 함께 전보다 부드러워진 말투로 이렇게 답했다.


-최선을 다한 거 아니고오~ 대에추웅 했다니까요~

-그래~ H가 대. 충. 했어도 훌륭한 거야. 왜냐하면 하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H는 꾸준히 학원에 나왔어. 그리고 어찌 되었건 책을 읽고 진단평가도 받고 학습지도 풀잖아. 솔직히 어른들도 하기 싫은 일 시키면 H처럼 그렇게 꾸준하게 하기 힘들거든.


H는 처음 본 어른이의 솔직한 고백에 다소 놀란 듯싶었다. 나도 어린 시절엔 어린이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어른들은 무엇이든 척척 다 잘하는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선생님은 H의 꾸준함을 칭찬해주고 싶어. 선생님이 진짜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떤 부류인지 말해줄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꾸준히 정진하는 사람이야.

어떤 날에는 70점도 받았고, 또 어떤 날에는 30점도 받았어. 그리고 또 어떤 날에는 100점도 받았지. 그렇지? 그럼 H는 노력하면 100점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인 거야.

하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넌 오늘도 나와서 조금씩 발전해가고 있어. 그런 책임감 있는 사람이 진짜 대단하고 멋있는 거야. 선생님은 단순한 점수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런 H의 태도를 칭찬해주고 싶어. 끊임없이 도전하다 보면 좌절할 때도 있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 나아가는 과정이 인생에선 진짜 멋진 거야. 


내 말이 다 끝나자 H의 큰 눈이 더욱더 커지더니, 작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콕콕 찌르면서 묻는다.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요?

-응~ H는 그런 사람이야. 게다가 매우 야무지고 똑 부러지지.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은 딱 보면 알아!


그동안 작은 사람이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해준 덕분인 걸까? 그 순간 H는 오늘 본 표정 중에 가장 활짝 웃어 보였다.

단순히 아이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한 말도, 아이를 조종하기 위한 칭찬의 말도 아니었다. 사실 H에게 한 말은 평소 내가 나에게 끊임없이 들려주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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