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54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54
ㅡ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1898년> ㅡ
<1987>
이 숫자는 한국 현대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 해를 제목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나 역시 <1987>을 잊지 못한다. 당시 스물일곱 고시생이었던 나는 6월 광주 밤거리를 운동화 끈을 동여맨 채 하얗게 지새웠다.
그리고 마침내 6.29일 오전, 고시원 총무가 고시원 독서실 문을 벌컥 열고 외쳤다.
"전두환, 노태우가 항복했다!"
"김대중이 사면되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한단다!"
우리 모두는 독서실을 박차고 나와 TV 앞으로 달려갔다.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방송됐다.
환호성과 만세, 그리고 낮술파티,
그 날의 신선한 열기와 감동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처럼 '1987년'은 우리 국민의 의지와 민주주의 가능성을 증명한 해였다.
그런데 그런 의미 있는 '년도'가 우리 역사 속에는 또 있었다.
바로 <1898년>이다.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우리는 수많은 년도를 외워야 했다.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918년 고려건국, 1392년 조선건국, 1876년 강화도 조약, 1894년 갑오농민전쟁 등등...
하지만 <1898년>은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나 역시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보다 더 경이롭고 감동적인 해는 없었다.
어쩌면 <2016년> '촛불혁명'에 버금가는 '평화적 민중운동' 결정적 승리가 잠시라도 있었던 '해'였다.
민중이 주도하고 정권을 흔들고, 사회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던 해, 그것이 바로 <1898년> 였던 것이다.
<1897년>, 고종은 수치스러운 '아관파천'으로 머물고 있던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오자마자 뜬금없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조선 역사상 가장 힘없이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황제국' 을 칭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 결성되어 있던 '독립협회'가 요구한 개혁과는 정반대였다.
고종은 '수구파·친러파' 중심의 내각 구성하고 '전제군주체제'로 회귀하려 했다.
고종 본인은 '황제'가 되었고,
이미 죽은 민비는 '명성황후'가 된
'빛 좋은 개살구'였을 뿐이었다.
황제국 백성들이 된 민중들 마저 환호하기는 커녕 '독립협회'와 함께 이러한 흐름에 정면으로 저항한다.
고종의 이러한 흐름에 맞서기 위해 <1898년 3월> 조선 최초 근대적 민중집회 <만민공동회>가 한양 종로에서 열렸다.
당시 한양 인구가 약 20만 명 였는데, 그중 8,000명이 거리로 나왔다. 당시 교통여건이나 홍보 등 여러상황을 감안해 보면 오늘 날 수백만 명이 도심에 모인 것과 맞먹는 엄청난 규모였다.
백성들은 외쳤다.
"러시아 절영도 조차 반대!"
"외국 군사·재정고문 철수하라!"
이에 놀란 고종은 결국 <러시아고문철수, 수구내각사퇴> 를 단행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 평화로운 힘에 의해 정권이 교체 되는 순간이었다. 비록 왕이 퇴위 한 것은 아니였지만, 내각이 사퇴 하고 새로운 정부로 교체된 일은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중대한 사건이었다.
절대왕조 시대에 폭력이 아닌 평화로 정권을 바꾼,
<1898년 민중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무력투쟁 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일을 해 낸 것이다.
<1898년> 이 장면은 우리 역사 에서 최초 평화적 정권교체 모습 이었으며, <2016년 촛불혁명> 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8년 10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던 고종은 또다시 수구적인 '조칙'을 내려 언론과 집회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독립협회는 이에 강하게 맞섰다.
“만국에 평형하는 것은 폐하의 권리이며, 탄핵해 성토하는 것은 백성의 권리이다.”
결국 고종은 '조칙'을 철회했고, 같은 해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백성과 정부가 함께 한 유례없는 대토론회, <관민공동회>가 개최된다.
이전 <만민공동회>와는 다르다. 역사시험에도 자주 나오는 문제인 만큼 착각없길 바란다.
<관민공동회>는 요즘도 볼 수 없는 정부, 여ㆍ야 할 것없이 모든 정당, 시민단체, 일반 백성들이 함께 모여 토론회를 연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무이한 장면이다.
심지어 백정출신 '박성춘'이 개회 연설을 할 정도로 활짝 열린공간 이었다.
그리고 역사적 결의가 나온다.
바로 ‘헌의육조'(獻議六條)이다.
'헌의6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일본에 의존하지 말 것
2. 외국과의 이권계약은 대신 단독으로 하지 말 것
3. 재정을 공정히 하고 예산을 공표할 것
4. 공판과 언론·집회의 자유 보장할 것
5. 고위직 임명은 다수 의견에 따를 것
6. 기타 규칙을 실천한다.
겁많고 심약한 고종은 백성들 모인 규모에 놀라 '헌의6조' 개혁안을 수정없이 재가했다.
드디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중에 의한 '입헌정치'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역시 우리나라 역사는 아직 백성들 편이 아니였다.
<1894년 11월 4일 밤> 수구세력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고종에게 일러바친다. 아니 내 생각에는 고종이 그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고 퍼트려라고 시켰을 것이다.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하려 한다!"
그 말에 고종은 곧바로 <독립협회 해산, 비상계엄 선포, 헌의6조 폐지>를 단행한다.
불행히도 고종의 이러한 '친위쿠데타'는 성공하고 만다.
겨우 하루!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이 단 하루 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역사 속 위정자들은 늘 이랬다.
민중이 거리로 나서면 굴복하는 척 하다가, 민중이 약속을 믿고 물러서면 그 약속을 저버리고 더 세게 탄압에 나서기 시작했다.
'동학혁명'도 '집강소'라는 그런 꼬닥수에 넘어가 실패하고 말았다.
<1898년>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이 고종 약속을 믿고 해산하자마자, 수구세력은 즉시 탄압을 시작 했던 것이다.
결국 민중은 그 탄압에 지도력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김수영 시인의 '풀'에 나온 것 처럼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
백성들은 바짝 엎드리고 말았다."
그러나 <1898년> 그 해 민중은 깨어 있었고, 행동했고, 세상을 바꾸려 했다.
비록 <1898년>은 최종적으로 좌절되었지만, 그 용기와 연대는 <1987년> '6월항쟁'으로, <2016년> '촛불 혁명'으로, <2024년> '빛의혁명' 으로 부활했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선 것이다"
역사는 가끔 비슷하게 반복된다.
그리고 항상 중요한 순간에는,
못 난 위정자와 기득권층은 민중 목소리를 '공포'로 바꾸려 한다.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하려 한다"
"부정선거가 있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한다"
바로 얼마 전에도 이런 비슷한 수법이 되풀이 되어었다.
그러나 우리는 <1898년>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
깨어 있는 민중만이 민주주의를 지킨다. 그리고 결국 역사를 바꾸는 것도 민중이다.
<1898년>
그 해를 실패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탄압과 침묵 속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해는 '무너진 해'가 아니라,
'시작된 해'였다.
희망이 움트고, 저항이 태동한 해였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1898년>을 잊고 살아왔다.
이제 그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자주 고개를 들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의 뿌리를 붙잡아야 한다.
그 시작은, 잊힌 과거를 다시 부르는 것에서 부터이다.
<1898년>, 그 뜨거운 기억을 다시 꺼낼 때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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