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을 통해 바라본 나의 글쓰기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53
ㅡ 나는 왜 쓰는가? 왜 절망 하는가? 그리고 또 ... ㅡ
('조지 오웰'을 통해 바라본 나의 글쓰기)
몇 년 전에 써두었던 소설 초고,〈홍길동을 찾아서〉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오래된 일기장을 펼치는 기분이었습니다.
다시 고쳐보려 했지만, 손을 대면 댈수록 글은 점점 나를 떠나는 듯 했고, 나는 내 재능의 한계 앞에서 절망했습니다.
문학을 전공한 적도, 정식으로 창작 수업을 받은 적도 없었던 저는 그저 취미처럼 글을 써 왔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왜 이렇게까지 이 일에 매달릴까?”
“완성한들, 누가 읽어주긴 할까?”
“혹시 비웃음거리가 되진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글을 씁니다.
며칠 전, '조지 오웰'의 산문 〈나는 왜 쓰는가〉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 속 문장 하나가 유독 깊게 남았습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맞습니다. 글쓰기란 고통이자 본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내 안에도 그런 ‘귀신’은 분명 존재합니다.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결국 다시 글쓰기 앞에 앉게 만드는 귀신!
조지 오웰은 글쓰기 동기를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인정받고 싶은 이기심
2.아름다운 문장을 향한 미학적 열정
3.진실을 기록하려는 역사적 충동
4.세상을 바꾸려는 정치적 목적
오웰은 이 중 4번째, 정치적 목적 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저 또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 역시 정치적인 글을 써왔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지역사회에서 작은정치와 행정 모순을 겪으며, 내 글은 자연스럽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역사를 주제로 쓴 글들 역시 당대 시대를 읽어가면서 정치적 관점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글쓰기는 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비난과 오해, SNS에서 강제퇴장,
그 여러 경험들이 글을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오웰이 제 1, 2차세계대전 격동의 시대에 그런 글을 썻다는 사실이 더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그의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는 단순한 문학이 아닌 예언서로까지 평가받습니다.
오웰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적으로 써야 한다는 책임감을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시 쓰고 있는 소설 〈홍길동을 찾아서〉도 결국은 ‘정치적 소설’입니다.
제가 <조선오백년도 흐른다>를 쓰면서 뼈저리게 느낀 조선사대부 들이 구축한 오도된 성리학 질서 억압성과 모순을 해체하고,
그 안에서 '전우치'와 '홍길동' 등 서얼출신 인물들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보려 했습니다.
당시 현실에서는 바꿀 수 없었던 흐름이었지만, 소설 안에서는 다른 선택과 다른 결말을 그려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뜻이 깊어질수록 문장은 얕아졌고, 나의 한계는 점점 뚜렷해졌습니다.
저는 '조지 오웰'처럼 탁월한 문장가도, 구조적 설계가 가능한 소설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시 또 글쓰기에 나섭니다.
왜냐하면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자신을 복원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온 궤적,
내 정치적 좌표,
내 생각의 결을
어딘가에 남겨두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이루지 못한 무결한 도덕심, 순수한 열정, 작지만 의미 있는 성취감 등
이 모든 것들을 적어도 내 문장 안에 붙잡아두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내 글이 언젠가 연기처럼 사라질지라도,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오늘도 한 줄
글을 씁니다.
문득 궁금해 집니다.
저와 같은 방식으로 글쓰기에 나서는 수 많은 분들,
"당신은 왜 씁니까?"
"당신 안의 '귀신'은 어떤 모습인가요?"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