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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7

삼국통일의 시대 2 ㅡ고구려 ‘화친파’와 ‘주전파’ 갈등, 그리고 연개소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7

ㅡ 삼국통일의 시대 2 ㅡ

(고구려 ‘화친파’와 ‘주전파’ 갈등, 그리고 연개소문 쿠데타)


고구려 ‘영류왕’ 편에서 언급했듯, 영류왕은 수나라와의 네 차례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재정비하기 위해 전쟁 회피와 당나라와 우호적 외교로 시간을 벌려했다. 당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문명을 갖춘 강대국이었고, 영류왕은 이를 활용해 고구려 재도약 기반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내부 정치 상황은 달랐다.


<당과의 관계를 두고 강경파 ‘주전파’와 온건파 ‘화친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대외적 위협을 어떤 전략으로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가 갈등으로 표면화된 것이었다.


고구려 최고 귀족가문 출신이며, 고위관료였던 '연개소문'은 주전파 대표였다. 그는 당나라에 강경하게 맞서야 하며, 군사력을 통해 고구려 독립성과 자주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영류왕'을 중심으로 한 화친파는 당과 화친을 통해 전쟁을 피하고 고구려 생존과 체제를 보존해야 한다고 보았다.


1. 한국사 속 반복되는 ‘주전 vs 화친’ 갈등


본격적으로 연개소문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 역사 속에는 외침이 닥칠 때마다 반복된 ‘주전(강경)’ 과 ‘화친(온건)’ 갈등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병자호란 (1636~1637) 당시 조선조정의 갈등이다.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강경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화친파)가 청나라에 대한 대응을 두고 극렬하게 논쟁했다.


이 시기 조선 '광해군'과 고구려 '영류왕'은 유사한 면이 많다.


광해군과 영류왕 둘 다 전장에서 공을 세운 뒤 왕위에 올랐고, 왕으로서는 대외 평화정책 으로 전쟁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두 왕 모두 대외평화정책을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났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다만 영류왕은 쿠데타 직후 참혹 하게 살해당했으며, 광해군은 그렇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광해군이 사라진 뒤 인조정권은 후금(청)에 강경하게 대응했고, 결국 정묘·병자호란 이라는 대전쟁을 초래했다. 이때 조선 조정은 적을 눈앞에 두고서도 ‘척화’와 ‘주화’를 두고 내분만 벌였다. 이는 국가 외교와 생존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영화 '남한산성'이 이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비슷한 양상은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나타난다.

'강감찬'을 축으로 한 '주전파'와 거란에 항복하자는 '화친파'가 대립했다. 다행히 이 때는 주전파 강경파가 거란에 대승리를 함으로써 주전의 명분을 찾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감정적으로 ‘주전파’의 결연함에 호응하고, 이를 민족적 기개로 읽는다.


그러나 당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또 역사적으로 보아 반드시 그 전쟁이 필요했는가?라는 질문도 남는다.


특히 몽골의 고려침략을 보면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는 “몽골에 가장 오래 저항한 민족”이라며 자부하지만, 그 과정에서 30년간 크고 작은 9차례 침략을 당해 수십만 백성 희생, 문화재 소실, 전국토 황폐, 경제붕괴 라는 무시무시한 피해를 겪었다.


이런 참혹한 상황속에서도 당시 집권세력인 무신정권은 30년 간 강화도에 숨어 호의호식하며 권력과 특권을 누렸다. 죄 없는 백성들만 참혹한 피해를 홀로 감당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를 “자랑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백성과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항복도 하나 전략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유럽도시 중 문화재가 잘 보존된 곳들은 전략적 항복을 통해 전쟁 피해를 최소화한 사례가 많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 체코 '프라하'이다


2. 고구려 내부에서도 벌어진 ‘주전 vs 화친’ 갈등


고구려도 동일했다.

'영류왕'은 대외 평화 전략으로 전쟁을 막고 국력을 재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이를 굴욕으로 보고 반발했다.


결국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사지 절단설이 전한다), 영류왕 조카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고구려 최후의 왕, '보장왕'이다.


연개소문은 ‘대막리지’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철저한 중앙집권적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당나라와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귀족숙청이 잇따르며 내부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일부 민간야사에서는 연개소문과 안시성 성주가 갈등을 빚어 안시성을 공격했다거나, 안시성 전투 당시 연개소문이 고의로 지원군을 늦게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실제 사서인 '삼국사기'와 중국 '당서' 어디에도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중국 측 기록에는 연개소문이 안시성 전투를 함께 지휘했다는 단편적 기록이 보인다.


3. 연개소문과 신라의 악연, 그리고 당·신라 동맹의 배경


연개소문은 쿠데타 이후 당과 관계를 단절하고, 고구려 군사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신라를 공격했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협공으로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때 신라 김춘추는 도움을 청 하러 고구려에 갔었으나, 연개소문은 그를 옥에 가두어 죽을 고비에 몰아넣었다.

김유신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김춘추는 마지막 수단으로 당나라와 동맹을 추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연개소문의 강경책은 신라가 당 품으로 들어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절대적 원인이 되고 만다


4. 연개소문 쿠데타 양면성


연개소문 집권은 고구려 강력한 지도력 확보라는 긍정적 해석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당태종에게 고구려 침공 명분을 제공하고 '신라–당 동맹'을 자초 했다. 이는 고구려 멸망 흐름을 만든 결정적 사건이 되고 만다


이어서 '당의 침략과 안시성 전투'가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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