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쇠퇴기 8 ㅡ (영류왕! 명군인가, 사대주의자인가 2)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5
ㅡ 고구려 쇠퇴기 8 ㅡ
(영류왕! 보기 드문 명군인가, 유약한 사대주의자인가? 2)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영웅’이라 불리는 인물 대부분은 전쟁과 정복을 통해 이름을 남긴 경우가 많다. 반면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지키려 노력한 군주들은 대개 ‘유약하다’,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그러나 '영류왕'(고건무)만큼은 이러한 기존 관념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적대국인 수나라 사서에도 <고건무의 무예와 용맹이 절륜하였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그는 걸출한 장군이었다.
오늘의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시해당한 나약한 왕이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서 손꼽힐 만한 현명한 '명군'이었다.>
이는 글을 정리하면서 새롭게 느낀 내 개인적 소견이기도 하지만, 영류왕 실제 행적을 따라가 보면 결코 무리한 평가가 아니다.
그 평가를 우선 살펴보자.
1. 장수 고건무에서 현명한 군주 영류왕으로
영류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장수 고건무 시절 ‘평양성 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동시대의 을지문덕과 쌍벽을 이룰 만큼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외교와 내치에 힘을 기울여 고구려를 전쟁 피해에서 회복시키는 데 전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당 태종 침략을 막아낸 연개소문조차, 그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영류왕 시기 국력회복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의 강성귀족들은 영류왕을 ‘당에 굴복한 사대주의자’로 매도했고, 결국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현대에 와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영류왕 존재는 희미해졌고, 그를 시해한 연개소문은 만주벌판을 호령한 민족기개를 펼친 ‘영웅’으로 기억된다.
2. 흔히 제기되는 영류왕 비판과 그 오해
기존 학계 일부에서는 영류왕의 대외평화정책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1) ‘경관’ 철거
당 태종 즉위(626년) 후, 당의 태도는 급격히 강경해졌다. 631년, 수나라와의 전승 기념비인 ‘경관’(요즘 현충탑)을 철거하라는 당의 요구에 영류왕은 강한 압박 끝에 이를 수용한다.
그러나 영류왕은 곧바로 당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640년까지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동시에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하며 군사적 대비에 착수했다. 이는 영류왕이 ‘온건 일변도’ 군주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2) 당에 군사기밀 유출?
고구려 주요 영토가 표시된 지도를 당 사신에게 주어 침략을 용이하게 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를 국경확정 협상용 지도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3) 거란·말갈 이탈 방치?
영류왕의 평화정책으로 고구려 위상이 약화되면서 주변 세력이 고구려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전쟁을 치르지 않는 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대규모 전쟁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4) 강경파와의 갈등 관리 실패?
영류왕의 평화정책은 연개소문을 비롯한 강경파 귀족 반발을 샀다. 일부학자들은 을지문덕 또한 강경파였고, 수나라를 선제공격 하자고 주장하다 영류왕에게 제거됐다는 가설도 제시한다.
결국 연개소문은 고건무 부하에서 강경파 수장이 되었고, 쿠데타로 영류왕을 시해한다.
5) 백제·신라에는 적대적이었다?
영류왕의 평화정책이 당에만 적용되었고, 백제·신라에는 강경책을 유지해 모순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를 고려하면 완전히 비합리적인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는 신라가 기세를 크게 올리다 다시 백제에게 밀리고 있었다. 백제가 왜와 연합 고구려까지 넘보고 있었기에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진짜 문제는 신라 김춘추가 백제 공격을 막아달라며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을 때였다. 당시는 연개소문이 집권할 때인데 연개소문이 신라 구원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신라는 당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영류왕보다 연개소문 책임이 훨씬 크다.
6) 저자세 외교로 당의 오만을 키웠다?
당이 고구려에 현재 서기관급에나 해당되는 하급 관리를 보내고 한사군 지역을 자기 땅이라 주장하는 등 도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당 태종 즉위 이후의 변화로, 초기에는 고구려, 당 관계가 비교적 원만했다.
당태종의 무리한 요구가 이어지자 영류왕도 점차 대응책을 마련했고 그 결과 천리장성 축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오만한 당 태종 이세민 문제였지 영류왕 잘못이 아니다.
3. 영류왕의 정책을 다시 바라본다면
기존 비판은 대체로 단기적 현상만 보고 영류왕 전체 정책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1) 영류왕이 아니었다면 고구려는 계속 전쟁 상태였을 것이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고구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영류왕이 당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전후 복구와 경제·군사력 재건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기반이 훗날 연개소문의 대당 전에서 빛을 발한다.
2) 영류왕은 결코 평화정책에만 집착한 군주가 아니었다
외교적 긴장 완화를 이용해 장기적 군사전략을 준비했고, 이는 이후 고구려 방어체계의 근간이 된다.
3) 천리장성 축조의 시발점도 영류왕
비사성~부여성에 이르는 장성은 고구려 서쪽 국경의 핵심 방어선으로, 영류왕이 착수한 대규모 국방 프로젝트였다.
4) 고구려 멸망 책임을 영류왕에게 돌릴 수 없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영류왕 사후의 일이며, 결정적 원인은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들 간 내분이었다.
연남생 : 북부 10만 호를 이끌고 당에 투항
연정토 : 남부 성들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
고구려를 붕괴시킨 것은 연 씨 가문의 분열이지, 이미 시해된 영류왕의 정책이 아니었다.
5) 영류왕이 당에 굴복했다고?
초기 당과 고구려 관계는 상호 필요에 의한 안정적 관계였다. 문제는 당태종 즉위 후 강경화 된 당의 태도였다. 영류왕은 변화에 맞춰 대응했고 전쟁 준비도 병행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기도 전에 연개소문에게 시해당했다. 더욱이 고구려 멸망 직후(669) 토번의 발호로 당은 동이전선에 전력을 투사하기 어려웠다. 영류왕식 전쟁지연 전략이 계속 이어졌다면, 고구려는 당과의 충돌을 피할 가능성도 있었다.
4. 연개소문 정변과 영류왕의 비극
642년 10월, 영류왕은 연개소문 권력독점을 견제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연개소문이 먼저 쿠데타를 일으킨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하고 고구려 마지막 왕이 되어버린 조카 '보장왕'을 옹립했다. 중국 기록에는 영류왕의 시신을 다섯 토막 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중국 측 의도적 왜곡 가능성 크다.
문제는 이 정변이 고구려를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었다는 점이다.
당태종이 고당전쟁의 명분 중 하나로 내세운 것도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징벌한다”는 이유였다.
5. 영류왕이 남긴 진짜 의미
영류왕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한 군주였다. 그는 가능한 한 평화 외교를 통해 전쟁을 피하려 했고, 그 기간 동안 고구려 국력을 다시 끌어올렸다. 기록에 따르면 영류왕 집권기 고구려 백성들 삶은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영류왕 그러한 업적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연개소문 영웅담은 크게 부각되었지만, 그의 성공을 뒷받침한 영류왕 공적은 ‘당에 굴복한 쫄보’로 왜곡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이 안시성 전투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류왕 시기 국력회복이 자리하고 있었다.
6. 여러분 판단에 맡긴다
과연 영류왕은 당을 두려워해 굽신거린 사대주의자였을까?
아니면 백성들을 전쟁에서 구하고 강대한 고구려를 다시 만들어낸, 우리 역사 속 보기 드문 현명한 명군이었을까?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다.
[‘고대사도 흐른다’가 어느새 막바지에 왔습니다. 자료도 적고 정리도 어려워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지금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부터 고구려·백제 멸망기 신라의 삼국통일 편을 정리해 나가겠습니다.]
– 초롱박철홍 –
두 번째 사진 : 당태종 이세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