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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4

고구려 쇠퇴기 8 ㅡ (영류왕(고건무)! 전쟁영웅인가, 사대주의자인가?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4

ㅡ 고구려 쇠퇴기 8 ㅡ

(영류왕(고건무)! 전쟁영웅인가, 사대주의자인가? 1)


역사는 때로 잔인하다.

한 인물이 남긴 위대한 업적도, 시대굴곡과 권력그림자 속에서 쉽게 지워지곤 한다. 심지어 영웅적 행위마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불명예스러운 이름 하나뿐일 때도 있다.


그 비극의 중심에 선 인물,

바로 '고건무', 즉 '영류왕'이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모른다.

‘고건무’가 '연개소문'에게 시해된 비운 군주 ‘영류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나도 이 역사 글을 쓰면서야 알았다.


고건무는 그저 불운하게 죽은 임금이 아니었다. 그는 수나라 제2차 침공 때 수나라 수군을 몰살시킨 '을지문덕'에 견줄만한 용맹의 장수였다.


수나라 해군 병력은 육군보다 적었지만, 그 전략적 중요성은 30만 별동대 궤멸시킨 '살수대첩' 못지않았다. '수양제' 모든 계획은 바로 수군 보급력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수양제' 전략은 간단했다.

수군장수 '내호아'가 해군 이끌고 보급을 책임지며 평양성으로 전진해 오는 '우중문' 30만 별동대 먹이고, 그 힘으로 평양성 포위해 고구려를 항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양제 계획은 고건무에 의해 완전히 뒤집혔다.


평양성 기록에 의하면 고건무는 패한 척하며 내호아를 성 부근까지 끌어들였다. 약탈에 취한 수나라 해군 대열이 흐트러지자, 고건무는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돌격한다. 그 격돌로 수나라 수군 4만 명이 몰살된다.

살아남은 자는 수천 명뿐이었다.


수양제 전략은 그렇게 산산조각 났다.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속에 숨어 있던 또 하나 대첩, 바로 고건무 '평양성대첩'이었다.


만약 그날 고건무가 내호아 수군 무너뜨리지 못했다면, 우리는 오늘 을지문덕 살수대첩을 전혀 모를지도 모른다. 평양성은 함락되었을 것이고, 고구려는 그때 이미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고건무라는 이름은, 역사물결 속 조용히 가라앉았다.


중국 '수서'에 이름을 올린 고구려 장수는 단 둘, 바로 '을지문덕'과 '고건무'였을 정도로 고건무는 중국 측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란 늘 예기치 못한 쪽을 향해 흐른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 한 장면만 남기고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영웅’으로 기억되었다. 반면 고건무는 전쟁 승리 후 왕위에 오르고도 ‘연개소문에게 시해된 유약한 왕’, ‘사대주의자’라는 이름만 남긴 채 잊혔다.


그러나 영류왕 고건무는 '평원왕' 아들이자 '영양왕' 이복동생,

'평강공주'와 친남매로서 이미 명성 높은 명장이었고 나름 명군이기도 했다.


영류왕 통치는 당시 시대상황 속에서 고구려를 지키기 위한 고뇌의 연속이었다.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1. 평화주의자 vs 전쟁주의자


역사는 늘 평화주의자에게 가혹하다. 전쟁 소용돌이 속에서는 ‘평화를 택한 자’가 ‘비겁한 자’로 변색되는 경우가 많다.


'영류왕'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영류왕은 수나라라는 통일제국과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전쟁은 고구려 땅 깊숙한 곳에서 벌어져 조국에 큰 상처를 남겼다.


고구려 '청야전술'(논과 밭 등 식량을 모두 태워버리고 성으로 숨는 전술)은 승리 발판이었지만, 승리 후 고구려 손과 발 잘라버린 전술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류왕은 즉위하자마자 평화적이고 합리적인 외교, 즉 화친 정책을 펼쳤다. 고구려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였다.


마침 중국은 수나라가 무너지고, 당나라가 세워지는 혼란기였다.

당 건국자 당고조 '이연'은 고구려와 평화를 중시하며 우호관계를 강화했다.


고구려에게는 드문 ‘평온의 틈’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전쟁주의자 귀족들에게 영류왕 행동은 굴욕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평온은 곧 끝나고 만다.


당고조 아들이자 잔인한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남자, 중국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명군 중 한 명,

그러나 동시에 냉혹한 전쟁광인

바로 '이세민'(당태종)이 황제자리에 오른 것이다.


영류왕과 고구려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불운이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더 깊이 다루고자 한다.


2. 신채호 영류왕 평가, 그리고 과장된 전쟁주의의 그림자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류왕은 당나라를 두려워하여 비열한 정책을 펼친 임금이고,

그를 처단한 연개소문은 영국의 크롬웰과 같은 인물이다.]


무장독립을 주장했던 신채호 입장에서, 영류왕은 ‘평화주의자’가 아닌 ‘굴복한 자’였고, 연개소문은 혁명가적 영웅처럼 보였던 것이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영류왕을 좀 더 구체적으로 평가한다.


[건무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나라 군대를 쫓아낸 원훈이지만,

을지는 '북진남수주의'를, 건무는 '북수남진주의'를 주장하여 다투었다. 건무는 당과 화친을 맺고, 장수태왕 남진책을 따르며 신라와 백제를 공격했으나

서북확장을 주장한 세력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신채호는 영류왕 화친정책과 남진 정책을 비판했지만, 그 역시 영류왕을 ‘사대주의자’라고까지는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신채호 평가를 극단적으로 확장한 전쟁주의적 사학자들에 의해,

영류왕은 유약한 사대주의자로 낙인찍혔고, 연개소문은 민족 영웅으로 미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영류왕과 그의 정책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결과 라기보다, 전쟁주의자 연개소문을 띄우기 위해 영류왕을 상대화한 서술 방식에 가깝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 시대 국제정세와 고구려 상처를 고려할 때 영류왕 선택은 백번 옳았다고 본다.


우리는 민족의 기상을 노래하면서도, 그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선조들이 전쟁 속에서 삼켜야 했던 피맺힌 고통에는 좀처럼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더욱 자세히 풀어가겠다.


영류왕이 사대주의자로 몰린 이유, 그에 대한 반론,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 남기는 교훈 역시 다음 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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