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쇠퇴기 7 ㅡ( ‘을지문덕’과 살수대첩 2)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3
ㅡ 고구려 쇠퇴기 7 ㅡ
( ‘을지문덕’과 살수대첩 2)
與隋將于仲文(여수장우중문)
- 乙支文德 -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귀신같은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오묘한 헤아림은 지리에 통달했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을 알면 멈추시길 바라노라
ㅡ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 중 ㅡ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는 여수장우중문 시와 함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되곤 했다.
[을지문덕이 홀몸으로 수나라 진영에 사신으로 들어갔다.
내부에서는 ‘사신이니 살려 보내야 한다’와 ‘적장이니 죽여야 한다’는 격론 끝에, 사신으로 왔다는 이유로 살려 보내자는 의견이 채택된다. 덕분에 을지문덕은 살아서 무사히 돌아와 정찰정보를 얻었다. 이후 살려 보내자고 주장한 장수 '유사룡'은 살수대첩 대패 책임을 물어 처형당했다.]
이 이야기는 동화처럼 들리지만, 근거 있는 사실이다. 을지문덕은 뛰어난 지략뿐 아니라 목숨을 건 정찰을 서슴지 않은 강심장 장수였다.
또한 그는 '여수장우중문시'를 지어 적장을 조롱할 정도 학문도 갖추었다. 고려 말 '정도전'은 을지문덕을 통일신라 '최치원'급 문장가로 문신이라 칭했다.
즉 을지문덕은 문·무·지략을 모두 갖춘 드문 명장이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은 시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을지문덕이 홀로 적진에 사신으로 갔을 때가 아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수나라의 2차 고구려 침략(612) 상황을 정확히 살펴보아야 한다.
1. 수문제 죽음과 수양제 무모한 2차 침공
수나라 초대황제 '수문제'는 1차 고구려 침공 실패 이후 내치에 전념해 국력을 크게 키웠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즉위한 둘째 아들 '수양제'는 성품이 정반대였다. 무모하고 허황된 정책을 일삼던 수양제는 결국 세계 전쟁사에서도 보기 드문 113만 3,800명의 대군,
보급병 포함 300만에 육박하는 군세를 동원해 612년 고구려 2차 침략을 감행한다.
그러나 수나라 군은 이 엄청난 병력으로도 고구려 요동성 하나 점령하지 못한다.
이에 수양제는 새로운 전략을 세운다.
고구려군이 요동 방어에 집중한 틈을 타 '우중문'에게 정예 30만 별동대를 주어 평양으로 직공하고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 5만이 보급품을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합리적 공격 전술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 변수가 등장한다. 바로 '고건무'(훗날 영류왕) 활약이다.
수나라 수군 5만은 고건무에게 전멸을 당하고 만다. 이 엄청난 전투가 우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승리가 없었다면 '살수대첩'은 존재할 수 없었다.
고건무와 전투 이야기는 다음 편 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2. 을지문덕 전략 — '청야전술'과 유인작전
2차 침략 당시 고구려군 총사령관 은 을지문덕이었다. 그는 정면 전투를 피하고 '청야전략'(모든 식량과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과 함께 산성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수나라군을 철저히 지치게 했다.
또한 고구려군은 거짓 패배로 의도적 후퇴를 반복하며 적을 평양 근처까지 끌어들였다.
이것은 수양제 입장에서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고구려가 장기적으로 설계한 지연· 소모전이었다.
여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보급’이었다.
수나라 30만 별동군 보급을 담당하던 '내호아' 해군이 고건무에게 전멸했기 때문 우중문·우중술이 이끄는 30만 별동군은 사실상 보급도 못 믿고 고립무원이었다.
이에 부사령관 '우중술'은 그 위험성을 감지하고 돌아가자 했으나 수양제가 무서웠던 총사령관 '우중문'은 병사 1인당 70kg에 달하는 식량, 병기 등 군장을 강제로 지우는 바람에 수많은 병사들이 행군하면서 전투하기 전부터 탈진해 식량과 군수품을 몰래 땅에 묻어 버리기 시작했다. 고구려 주민들이 수나라 군이 지난 간 자리에서 이런 식량을 찾아내 잘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심했다.
이를 장수들이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별동군은 행군 중 굶주림과 피로로 인해 이미 전투불능 상태에 가까웠다.
이 모든 정보는 을지문덕 수중에 들어왔고, 을지문덕은 이후 자신의 작전 구상에 활용했다.
3. 을지문덕의 마지막 한 수 — ‘항복서신’과 '여수장우중문 시'
지칠 대로 지친 수나라군은 사실상 퇴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수양제 명령 때문에 쉽게 물러날 명분이 없었다.
이때 을지문덕이 퇴각 명분을 제공한다.
을지문덕이 “고구려 왕과 함께 수양제에게 직접 항복하러 오겠다”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이 서신에 첨부된 것이 바로 유명한 '여수장우중문' (與隋將于仲文) 시 였다.
우중문은 이 약속이 허무맹랑한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퇴각할 명분이 필요했기에 을지문덕 서신을 들고 결국 후퇴한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살수'(현 청천강이 다수설)였다.
여기가 을지문덕이 노린 결정적 포인트, 곧 '살수대첩'이다.
4. 살수대첩 — ‘수공(水攻)’은 허구다
우리 교과서에는 살수대첩이 ‘보를 쌓고 터뜨린 수공으로 이겼다’고 소개되곤 했지만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삼국사기, 수서(隋書), 당서(唐書)
등 어떠한 1차 사료에도 수공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고대 토목기술로 30만 완전무장한 병력을 한순간에 쓸어버릴 만한 인공댐을 전쟁 중 급조하는 것은 현대기술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살수대첩이 ‘수공’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31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때문이다.
여기서 “을지문덕이 모래주머니로 상류를 막고 적이 강을 건널 때 터뜨렸다”는 서술이 처음 나온다.
이후 위인전과 교과서가 이를 반복하면서 정설처럼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창작에 가까운 오해이다.
<그렇다면 살수대첩 승리이유는 무엇인가?>
1) 고건무가 수나라 수군을 전멸시켜 보급선을 끊었다.
2) 병사 다수가 굶주림·탈진으로 전투력이 바닥이었다.
3) 대군이 가장 취약한 순간인 강 도하 중인 수나라군을 기습했다.
4) 수나라군은 후퇴 행군이라는 가장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즉, 물의 힘이 아니라 을지문덕의 장기전략과 수나라군 스스로 붕괴 가 승리를 만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을지문덕 공적이 결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전략적 통찰력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5. 3차·4차 침공과 고구려의 버티기
살수대첩에서 참패했음에도 수양제는 정신을 못 차렸다.
불과 4개월 뒤인 613년, 다시 대군을 동원해 3차 침공을 감행한다.
이번에는 이전 패배를 교훈 삼아 장수들에게 재량권을 주었고, '요동성'은 오히려 함락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나 수나라 내부에서 양현감·이밀'의 대규모 반란이 터져 수양제는 급히 철수한다.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후에도
수양제는 고구려를 포기하지 못했다.
614년, 4차 침공을 시도해 수군 장수 '내호아'로 하여금 '비사성'을 공격하게 했고, 고구려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기에 결국 비사성이 함락된다.
'여수전쟁'에서 수나라가 거두어 낸 거의 유일한 승리였다.
그러나 수나라는 이미 내부 반란이 심각했고 육군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고구려 역시 청야전술 후유증으로 피폐해져 이 상황에서 다시 대규모 전쟁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곡사정' (谷士貞) 이다.
그는 '양현감'과 친분이 있어 반란 당시 수나라 기밀을 갖고 고구려로 망명했던 인물인데, 고구려는 그를 수나라에 돌려보내는 형식으로 수양제에게 화친을 청했다.
수양제도 이를 받아들이며 철군을 명한다.
그러나 곡사정은 돌아가자마자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정사 '수서'(隋書)에는 곡사정을
과녁으로 삼아 관료들이 활을 쏘고, 살을 발라 삶아 먹게 하고,
뼈는 모두 태워 재를 흩뿌렸다는
잔혹한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실, 고구려는 곡사정을 이용만 해 먹고 그를 버린 것이다. 비겁한 일이었지만 고구려가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곡사정 희생은 말 그대로 고구려를 위한 살신성인이었다.
한 개인의 죽음이 양국의 수많은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수나라 간 4차례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수나라는 곧바로 내부 붕괴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6. 잊혀진 영웅 — 고건무(영류왕)
이 모든 과정에서 을지문덕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하고도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전쟁 영웅이 있다.
바로 '고건무', 훗날의 '영류왕'이다.
그는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며, 수나라와 전쟁에서 수군 5만을 전멸시킨 인물이지만 대부분의 공적은 을지문덕의 명성에 가려져 있다.
왕이 된 뒤에는 당나라 침공 대비를 위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 사대주의자로 몰려
오히려 연개소문 쿠데타에 희생되며 억울한 최후를 맞는다.
그의 상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룬다.
7. 맺으며
4차례에 걸친 수·고구려 전쟁은 양국에 막대한 인명·물자 손실을 남겼다. 그러나 고구려는 끝내 버텨냈고, 수나라는 결국 내부 붕괴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을지문덕, 고건무, 곡사정>과 같은 빛나거나 혹은 잊혀진 영웅들이 있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