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시대 6 ―(수나라 113만 대군의 진실은?)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1
― 삼국통일의 시대 6 ―
(수나라 113만 대군의 진실은?)
앞 편에서 언급했듯이 ‘수나라 113만 대군’ 실체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논쟁 대상이었다. 나 역시 '수·당과 고구려 전쟁'을 공부하면서 <과연 당시 수나라가 113만이라는 병력을 실제로 동원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이번 글에서는 그 의문을 역사적 근거 바탕으로 자세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고대 전쟁사와 ‘백만 대군’이라는 표현
고대 전쟁사를 보면, 규모가 큰 전투일수록 흔히 ‘백만 대군’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중국 삼국지 등 동아시아 사서 전반에서도 이런 표현은 매우 흔하다. 실제로 수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했다는 기록은 '구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 등 여러 사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수서'·'북사'는 113만 3,800명 동원했다고 뒷자리 숫자까지 상세히 기록했으며 기록,
<軍行千里,首尾不相見>
즉, 수양제의 대군이 이동할 때 행렬의 길이가 천 리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어쨌든 당시에도 유례를 찾기 힘든 엄청난 병력을 동원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고대사서가 기록한 병력 규모는 전쟁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승패를 부각하기 위해 상당히 과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국가 체면, 군사적 위용, 혹은 패전 변명을 위해 숫자를 부풀렸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수나라 113만 명 역시 당시의 군사·행정· 병참 능력으로 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2. 수나라와 고구려의 인구 규모 비교
1) 수나라 인구
사서, 특히 '수서'를 기반으로 당시 수나라 인구는 대략 4,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수나라는 중국 대륙을 통일한 거대제국 이었고, 농업생산력과 행정조직 역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달한 국가였다.
2) 고구려 인구
반면 고구려 인구는 200만~ 3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멸망 시점에 60만 호 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 호당 4~5명으로 계산한 결과다. 영토는 넓었지만 혹독한 기후와 제한된 농경지 탓에 인구는 수나라에 비해 훨씬 적었다.
3) 고구려 동원 병력
고구려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 규모는 10만~15만 명 정도로 본다.
이러한 '수나라ㆍ고구려' 인구 구조를 볼 때, 수나라가 성인 남성 5분의 1 가량을 고구려 원정에 투입했단 주장(113만 명 동원설) 은 상식적으로도 성립하기 어렵다.
3. 실제 동원 가능 병력 규모는?
113만 명 출전했다고 가정하면, 병참·장비·식량·말·수송 인력까지 포함해 300만 명 이상 움직여야 한다. 이는 현대 도시규모로 보면 부산시 전체 인구가 이동하는 셈인데, 고대 행정력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수 역사학자는 사서기록 신빙성을 인정하더라도 113만이라는 숫자는 ‘전체 동원 대상’ (부역민, 운반 인력, 공사 인력 포함)을 의미하며, 실제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30만~50만 수준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30만 대군조차 고대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도 거의 전례가 없는 규모다. 서구 최강 제국 로마조차 한 번에 10만 명을 넘는 원정군을 운용하기 어려웠다.
1) 서양의 유사 사례
- 테르모필레 전투(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군대는 실제로는 10만~15만 명으로 추정되며, 고대 사서의 200만 명 기록은 과장으로 평가된다.
- 그리스군은 7,000명 정도(스파르타 300 포함).
이처럼 30만~50만 동원설도 이미 고대 세계 최상위 규모이며, ‘113만 대군’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4. 살수대첩(612)의 ‘30만 대군 몰살’ 진실
살수대첩에서 수나라가 30만 대군을 잃었다는 말은 한국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과장으로 볼 여지가 많다.
1) '삼국사기'는 수나라가 30만 명을 보냈고, 을지문덕이 이를 크게 격파했다고 기록한다.
2) 수서·자치통감은 수나라가 패배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병력 규모는 불명확하거나 축소하여 기록 ‘30만 전멸’이라는 표현은 없다
3) 역사학자들의 견해
병참능력상 별동 정예군이 실제로 30만 명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만약 30만 명이 몰살되었다면, 수나라는 즉시 국가 붕괴가 왔어야 한다.
실제로는 수나라는 다음 해에도 다시 고구려 침공을 시도했고, 멸망은 그보다 훨씬 뒤인 618년이다.
또한 강 하나에서 30만 명이 전부 익사한다는 설명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부는 패주하며 본국으로 귀환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따라서 살수대첩의 실질적 피해는 크지만, ‘30만 전멸’은 전투 극적 효과를 부각한 후대적 과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실적으로는 실제로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20만 명 내외, 전사자는 그보다 훨씬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규모
당나라 역시 고구려와 전쟁에서 숫자를 과장한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
학계에서는 20만~50만 사이로 보지만, 실제 전투 투입 병력은 20만 정도가 가장 합리적인 추정이다.
안시성 전투도 같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6. 고대·중세 전쟁에서 병력 과장 사례
100만 대군이라는 표현은 고대뿐 아니라 중세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 동원 능력은 대부분 수만~수십만 규모였다. 이는 병사 유지 비용, 식량 생산력, 병참 능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대표적 과장사례를 살펴보면,
1) 몽골 침략기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을 기록에서는 ‘수십만’이라 했으나 실제로는 3~4만 명 수준.
2) 임진왜란(1592)
조선 기록에선 ‘백만 대군’ 표현이 있지만 실제 일본군은 약 15만 명.
3) 병자호란(1636)
청군도 ‘수십만’이라 기록되지만 실제는 10~13만 명 수준.
결국 고대·중세의 ‘백만 대군’은 실제 수치가 아니라 위기감· 전쟁 중대성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7. 한국 전쟁사에서 실제 ‘100만’이 동원된 사례
우리나라 역사에서 실제로 100만 명이 넘는 외국병력이 투입된 사례는 6·25 전쟁이다.
중공군은 총동원 규모가 실제로 100만 명 이상으로 확인된다.
오죽하면 당시에 "원자폭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중공군 인해전술" 이란 말이 나돌았다.
즉, ‘백만 대군’이 현실화된 것은 20세기 이후 세계대전급 병참 체계가 갖춰진 현대에 들어서야 가능해졌다.
8. 결론
수나라 113만 대군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병참·행정 능력을 고려하면 과장된 숫자이다.
실제 동원 병력은 30만~50만, 실전 투입 병력은 20만~30만 규모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살수대첩 역시 피해는 매우 컸으나 ‘30만 전멸’은 과장된 표현이다.
고대·중세의 ‘백만 대군’은 실제 병력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 표현에 가깝다.
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백만 단위 병력 운용이 가능해졌으며, 한국 역사에서는 6·25 전쟁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어서 백제 쇠퇴기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