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시대 7 ―(백제후반기 왕들의 역사)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2
― 삼국통일의 시대 7 ―
(백제후반기 왕들의 역사)
백제후반기, 특히 쇠퇴기에 대한 기록은 다른 시대에 비해 매우 부족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중국 정사에서도 백제 관련 내용은 매우 제한적이다. 오히려 일본 측 사서가 당시 백제상황을 전하는 데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이다.
그렇기에 백제후반기 역사는 남아 있는 단편적 자료를 토대로 간략하게나마 정리할 수밖에 없다.
백제는 '근초고왕'·'근구수왕' 시기 최고전성기를 누린 뒤 이후 왕들 치세에 들어서면, <고구려와 전쟁, 한성함락, 웅진천도> 등 거대한 격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다음은 그 시대 주요 왕들 통치와 백제의 변화과정이다.
1. <침류왕>(재위: 384년 ~385년)
백제 제15대 왕이자 '근구수왕' 맏아들이다. 왕위에 오른 해 중국 남조 '동진'에서 온 인도출신 승려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어 백제는 공식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침류왕'이 재위 2년 만에 죽었으며, 아들은 너무 어려 왕위를 잇지 못하고 동생 진사왕 이 왕위에 올랐다.
2. <진사왕> (재위: 385 ~ 392년)
침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진사왕은 백제의 제16대 왕이다. 그의 치세는 고구려와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특히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391~413)과 갈등으로 인해 백제는 큰 위협에 직면했다. 진사왕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백제 군사력을 강화하고 방어태세를 구축하려 했으나, 결국 고구려 공격으로 인해 백제는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
3. <아신왕> (재위: 392 ~ 405년)
진사왕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백제 제17대 왕이다. 아신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공격으로 백제가 크게 쇠퇴하던 시기에 즉위했다. 고구려 지속적인 침공에 시달리던 아신왕은 결국 고구려에 항복해 백제는 일시적으로 고구려 영향을 받게 된다. 아신왕은 나라 자주성을 회복하려 애썼으나, 외세 압박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해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4. <전지왕> (재위: 405 ~ 420년)
아신왕 뒤를 이은 전지왕은 백제 제18대 왕이다. 전지왕은 고구려 압박 속에서도 나라를 회복하려 노력하였으며, 중국 동진과 외교 관계를 강화하며 백제 국제적 위치를 되찾기 위해 힘썼다. 이로 인해 백제는 문화적, 외교적으로 다시 안정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기회도 마련되었다.
5. <구이신왕> (재위: 420 ~427년)
전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구이신왕(또는 비유왕)은 백제 제19대 왕이다. 구이신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려 했다. 이 동맹은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과 우호 관계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삼국 간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구이신왕의 이러한 외교 노력은 백제가 고구려 강력한 압박 속에서도 존속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6. <비유왕> (재위: 427 ~ 455년)
구이신왕을 이어 즉위한 제20대 비유왕도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강화했다. 비유왕 재위기간 동안 백제는 신라와 긴밀한 관계(나제동맹)를 맺어 공동방어를 시도했다. 이는 후대의 백제, 신라 동맹관계 기초가 되었다. 비유왕 시기부터는 백제가 외교와 군사동맹을 통해 생존전략을 모색하는 모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7. <개로왕> (재위: 455 ~ 475년)
비유왕 뒤를 이은 제21대 개로왕이다. 개로왕은 백제 자존심을 지키며 고구려와 갈등을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펴며 백제를 지속적으로 압박했고, 개로왕은 고구려 침략으로 인해 수도 '한성'을 고구려에 빼앗기며 전사하고 말았다. 개로왕 죽음은 백제에게 큰 위기였으며, 이후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지금 공주)으로 옮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8. <문주왕> (재위: 475 ~ 477년)
개로왕 뒤를 이어 즉위한 문주왕 은 백제 제22대 왕으로, 한성을 잃은 후 웅진으로 천도했다. 수도를 옮긴 문주왕은 나라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국가적 혼란이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백제 귀족세력 간 갈등으로 왕권을 온전히 세우지 못했다. 문주왕은 재위 2년 만에 왕위를 빼앗기고 살해되는 불운을 겪는다.
9. <삼근왕> (재위: 477 ~ 479년)
문주왕 뒤를 이어 즉위한 제23대 삼근왕 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그 또한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았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는 백제 왕권이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10. <동성왕> (재위: 479 ~ 501년)
삼근왕을 이어 제24대 동성왕이 즉위하며 백제는 다시금 안정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동성왕은 귀족세력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였으며, 나아가 신라와 '혼인동맹'을 추진해서 동맹관계도 회복한다. 또한 중국 남조의 '제나라'와 교류를 강화하여 백제는 문물과 외교적으로 활발한 발전을 이루어 백제 재부흥 발판을 마련한다.
[백제는 근초고왕 근구수왕 전성기 이후에도 무령왕과 성왕의 시기에 다시 한번 도약 기회를 맞이한다. 이들은 백제의 문화와 대외교류를 강화하며 나라의 중흥을 이끈다.]
11. <무령왕> (재위:501년 ~ 523년)
제25대 무령왕은 백제를 문화적으로 크게 성장시킨 왕으로, 중국 남조 '양나라'와 긴밀한 외교관계 맺고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무령왕 무덤은 1971년에 발견되어 당시 백제 찬란한 문화를 오늘날까지 전해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수도 한성을 잃고, 웅진(공주)으로 천도하면서 큰 위기를 겪는다.(문주왕 때 웅진천도)
그러나 무령왕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나라를 재정비한다.
무령왕 치적을 살펴보자.
1) 중앙집권 강화: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지방 귀족세력견제) 22개 담로(지방행정)를 왕족이 통치하도록 해서 백제 지방통제력 강화를 시도했고,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 확립 기반 마련 했다. 후대 성왕의 22부 관제도입 등 제도화로 이어진다.
2) 외교 안정: 남조 양나라와 외교관계 강화했다.
3) 문화 발전: 중국 문물 적극 수용, 무령왕릉에 남은 벽돌무덤과 중국식 장례문화가 대표 사례이다
4) 대표유산 무령왕릉을 남김:
충남 공주에서 발굴된 백제 무덤으로,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 청동거울, 목관 등이 출토되어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12. <성왕> (재위: 523년 ~ 554년)
제26대 성왕은 백제 왕들 중 그래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왕들 중 한 명이다.
백제 마지막 전성기를 이룬 무령왕 뒤를 이은 성왕은 더 큰 도약을 위해 천도와 개혁을 단행한다.
1) 사비 천도와 ‘남부여’의 꿈 (538년)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며 부여의 후예임을 내세웠다.
2) 귀족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시도했다.
22부 관제 도입 + 지방 행정 체계 정비, 수도: 5부 / 지방: 5방 체계로 정비했다.
3) 관료제를 체계화하며 고대 국가체제를 완성했다.
4)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격돌과 비극
성왕은 신라(진흥왕)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 551년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553년 신라(진흥왕)가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면서 갈등 폭발했다.
성왕은 신라 배신에 분노하여 직접 출정하지만,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며 백제 중흥은 큰 타격을 받는다.
5) 일본에 전한 백제 문화
성왕 때, '노리사치계' 등을 통해 불교를 일본에 전했다. 일본 최초 사찰건립에도 영향을 주었고, (아스카지, 호류지 등) 일본 왕실이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백제는 이외에도 많은 문화를 일본에 전달하고 일본이 불교와 유교의 결합을 통한 일본 고대 정치제도(예: 다이카 개신, 율령국가 건설) 등 국가이념 형성에 큰 영향 주었다.
이처럼 6세기 백제는 무령왕의 안정을 기반으로 성왕이 개혁과 외교, 문화전파를 통해 재중흥을 시도한 시기였다.
비록 성왕의 전사로 안타깝게 끝났지만, 이 시기 노력은 백제 후대 문화적 기반이 되었다.
13. <위덕왕>(재위: 554 ~ 598년)
성왕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은 백제의 제27대 왕이다. 성왕이 신라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백제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위덕왕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왕권을 유지하며 백제를 재정비하고자 노력했다. 위덕왕은 일본과 외교를 통해 지원을 받으며 백제 국력을 회복하려 하였다. 특히 불교를 장려하며 백성들 결속을 다졌다. 하지만 그의 치세 동안 신라와 전쟁은 지속되었고, 백제는 한강유역을 완전히 잃어버리며 국토가 점점 남쪽으로 밀려나는 상황을 겪게 된다.
14. <혜왕> (재위: 598 ~ 599년)
위덕왕 뒤를 이은 혜왕은 백제 제28대 왕이다. 혜왕은 위덕왕 아들이었으나, 그의 치세는 매우 짧았으며, 구체적인 업적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혜왕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사망하였기에, 그의 통치 기간에는 백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15. <법왕> (재위: 599 ~ 600년)
법왕은 백제의 제29대 왕으로, 불교를 장려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즉위 후 백제 사회에 불교를 더욱 널리 퍼뜨리고자 하였으며, 내적으로 불교 중심 통합을 이루려 하였다. 하지만 법왕 치세도 매우 짧아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개혁 의지도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채 끝났다.
[성왕 사후, 백제는 이처럼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 백제는 신라와 전쟁에서 밀리며,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16. <무왕> (재위: 600년 ~ 641년)
법왕의 뒤를 이어 제30대 무왕이 즉위하면서 백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무왕은 백제 수도를 웅진에서 익산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 일환으로 익산에 '미륵사'를 건립하며 국력을 과시한다. 무왕은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익산 미륵사 건립으로 유명한 무왕은 백제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 결속을 다지려 했다. 그러나 신라와 전쟁에서는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고, 백제 쇠퇴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17. <의자왕> (재위: 641년 ~660년)
의자왕은 제31대 백제 마지막 왕으로, 즉위 초반 에는 국력회복 위해 신라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을 막지 못하고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만다.
의자왕 이야기는 <삼국통일의 시대 백제 마지막 편>에서 다시 자세히 정리하겠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시작된 기원을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에서 강력한 왕국으로 자리 잡아, 특히 중국과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화를 꽃피운 나라였다.
'무령왕릉'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백제 문화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섬세함과 아름다움에서 신라나 통일신라 유물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비록 백제는 삼국 통일 과정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무령왕릉'과 '미륵사지'와 같은 유적을 통해 오늘날에도 그 찬란한 문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어서 <삼국통일의 시대 신라 편>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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