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0

삼국통일의 시대 5 ㅡ(주필산 전투와 안시성 전투)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0

ㅡ 삼국통일의 시대 5 ㅡ

(주필산 전투와 안시성 전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645년의 ‘안시성 전투’ 이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 대전투가 있었다.


바로 '주필산(駐蹕山) 전투'이다.


이 전투는 안시성 전투 공방전과 사실상 동시에 벌어져, 두 사건은 분리하여 볼 수 없다.


이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1. 당 태종 북진과 고구려 대응


'당 태종'은 20만 대군으로 고구려 요동 방어선을 순식간에 돌파하며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현도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특히 50만 석 군량을 비축한 요동성 함락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위협 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평양 방면으로 당군이 직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연개소문'이 대규모 지원군을 안시성으로 보냈다. 안시성은 평양으로 이어지는 전략 요충지 였기 때문이다.


2. 고구려 지원군 도착과 지휘부 엇갈린 의견


고구려는 <대대로 '고정의', 북부욕살 '고연수', 남부욕살 '고혜진'>이 지휘하는 약 15만 명을 안시성 외곽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전략 의견은 갈렸다.


총사령관 '고정의'는 안시성으로 들어가거나 인근에서 '청야전술'로 장기농성을 펼치면 당군은 추위가 오면 스스로 철수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부사령관 '고연수'·'고혜진'은

즉시 야전공격을 주장하며 '청야전술'은 고구려 백성 농사와 생존에 더 큰 피해라고 반발했다.


이 둘은 과거 살수대첩 승리를 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고연수 등이 총사령관 고정의에 반발하여 약 3만 7천 선발대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공격에 나선다. 고구려 군이 분열되고 말았다.


3. 주필산 전투 – 초기 승리와 최종 패배


고연수 초반 고구려군은 당군을 압도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중국 기록에서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주필산 전투에서 6군(친위군)이 고려군에게 제압당하자, 태종이 흑기(이세적의 대장기)를 살피라 명하였다. 흑기가 포위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 수당가화 ㅡ


그러나 계속된 교전 끝에 고구려 군은 당군 반격으로 포위되었고, 결국 구릉에 몰려 항복한다. '삼국사기'는 그 피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항복한 고연수·고혜진 휘하 병사 3만 6,800명, 장수급 3,500명만 당 영역으로 이송, 나머지는 석방, 말갈인 3,300명은 생매장, 당군은 5만 필의 말, 5만 두의 소, 갑옷 1만 벌 등 노획, 당 태종은 승리의 기념으로 산 이름을 '주필산'으로 고쳤다.]


4. 나머지 10만 고구려군의 행방 추정


사료에는 고연수·고혜진 휘하 병사 약 3만여 명 항복만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함께 출정한 나머지 10만여 명 본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중국 사서에 '구당서'에는 고구려군 10만을 풀어 보냈다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약 3만을 돌려보내주었다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상식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안시성 공성전을 앞둔 당 태종이 수만~10만 규모의 적군을 풀어줄 이유가 없다. 이는 당태종의 관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중국 특유의 허풍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추정 가능한 가장 합리적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1) 총사령관 '고정의'가 주장한 대로 10만의 본대는 안시성으로 들어가 장기 농성 준비를 했다.


2) 반면 고연수·고혜진은 본대와 떨어져 독자적으로 주필산 전투를 전개하다 패배를 하고 당군에 사로 잡혔다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신당서'의 구절이다.


[지금 안시성에 10만의 적병이 있어 남하하지 못한다.]


즉, 주필산에서 패주한 고구려군 ‘갈 곳’은 결국 안시성뿐이었으며, 총사령관 고정의가 본대를 지휘하며 농성전략을 실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 안시성 성주 문제와 ‘양만춘’ 이름의 실체


안시성 전투 영웅으로 '양만춘'이 알려져 있으나, 그의 이름은 사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소설 '당서지전 통속연의'에서 창작된 이름이며, 이는 명나라 시기 소설작품에서 나온 이름으로 양만춘은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해당소설에는 <‘달로 게리’, ‘도로화적’, ‘왕땅구’ >등 실제 고구려와 무관한 창작 이름도 함께 등장한다.


이 소설이 조선후기에 구전되며 ‘안시성주는 양만춘’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을 뿐이다.


안시성 성주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실제 지휘 책임이 원래 성주가 아니라, 10만 본대를 이끈 총사령관 '고정의'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6. 왜 당 태종은 안시성을 우회하지 못했는가?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대패했음에도 당 태종이 3개월간 안시성 앞에 묶인 이유가 있다.


안시성에 10만 규모의 고구려 본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면, 당군이 평양으로 진군하는 순간 보급로 차단과 후방 기습 위험이 현실화된다. 즉, 당 태종은 안시성을 반드시 제거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는 '고정의'가 의도한 장기전 전략의 성과이기도 했다.


7. 안시성 전투의 결말


당군은 매일 수차례 공성전을 감행하고, 마지막에는 거대한 토산까지 쌓았다. 그러나 고구려군 끈질긴 수성과 기습으로 토산도 점령당하며 공세가 무너졌다. 9월, 추위가 시작되자 당 태종은 퇴각을 결정한다. 안시성 승리는 고구려의 독립 의지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이 양만춘이 쏜 화살에 눈을 맞은 한쪽 눈을 잃어버려 퇴각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당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정사(正史)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은 후대의 전설이다.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이 세 곳 모두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이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이 없다. 특히 ‘한쪽 눈을 잃었다’는 내용은 일체 기록되지 않았다.


삼국사기등 고려·조선 초기 문헌 에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전설의 기원은 조선 후기 야담·민간 설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후 국난 극복 서사와 연결되며 널리 퍼졌다. 즉, 후대 민간에서 만들어진 ‘영웅담’ 성격의 이야기이다.


실제 정사기록에 따른 당태종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고구려 원정을 포기했다


안시성 공략 실패, 계절악화(혹한) 식량·보급 문제, 병사피로누적,

토산실패로 인한 사기저하 등 군사·보급·기후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철군이었다.


외세를 물리친 ‘통쾌한 승리’에 대한 민중적 정서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소설이나 민간 설화 영웅담을 진실의 역사로 알릴 수는 없다.


8. 이후 정세


안시성 전투 패배로 당나라의 고구려 정복계획은 좌절되었고, 당 태종은 동북아 패권 확보에 실패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신라–당 동맹>이 더욱 강화되고 있었고, 신라는 이를 바탕으로 삼국통일의 꿈에 본격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다음 편은 <신라 편 – 삼국통일 대업>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나라 110 만 병력 등 중국 수 십만 대군 침략에 대한 진실 편>을 정리 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27화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