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노래와 3·1 운동 역사적 의미 재고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6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6

ㅡ 3·1절 노래와 3·1 운동 역사적 의미 재고 ㅡ


오늘은 107주년 3.1절이다.


몇 해 전, 3.1절을 맞아 나는 3·1절 노래가사 오류문제와 3·1절 역사적 의미에 대해 글을 쓴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내 글은 조선양반사대부 지도층에 대한 비판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나의 감정적 어조가 너무 앞섰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내 문제제기 취지와 달리 논리적 설득력과 균형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이에 오늘은 내 감정적 평가를 최대한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과 자료에 근거한 분석을 통해 3·1절 노래 가사 오류 여부를 검토하고, 나아가 3·1절이 지니는 역사적· 사상적 의미를 보다 체계적으로 재고해 보고자 한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 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의 <삼일절 노래>는 오랫동안 학교 기념식에서 불려 온 대표적 3·1절 기념가이다. 그러나 노래가사를 곱씹어 보면 몇 가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한다.


1919년 당시 한반도 인구는

1919년 서울 인구조사자료에 따르면 약 1,700만~2,000만 명 수준으로 추정되며, 가사 속 '삼천만'은 실제인구와 차이가 있다.


독립선언서 낭독 역시 3월 1일 정오가 아니라 오후 2시경 서울 태화관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만세구호도 “대한독립만세”보다 “조선독립만세”가 더 일반적이었다.


당시 3.1일에 일반민중들은 태극기가 준비되지도 않았고, 흔들지도 않았다.


이러한 차이는 분명 사실 차원에서는 오류에 가깝다. 그러나 이는 기념가요가 지닌 상징적· 서사적 성격에서 비롯된 과장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다.


'삼천만'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민족전체를 지칭하는 상징적 숫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노래는 정확한 역사기록이라기보다 민족적 결속을 강조하는 상징적 언어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징이 때로는 3·1 운동 본질을 단순화하거나 왜곡된 기억으로 굳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그럼 3.1 운동의 의미에 대해서도 재고해 보겠다.


1. 3·1 운동은 무엇을 위한 운동이었는가?


우리는 3·1 운동을 독립운동 일환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을 단순히 ‘조선을 되찾기 위한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역사적 성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만일 그것이 '조선왕조복귀'를 지향한 운동이었다면, 조선 500년간 신분제 사회에서 구조적 차별을 경험해 온 다수 민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법적으로 신분제 폐지된 이후 상황을 고려할 때, 다시 신분차별 질서로 회귀를 지향하는 운동에 민중들이 호응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1919년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질서가 재편되던 시기였다.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약소민족에게도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국제원칙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그해 열린 '파리평화협상'은 식민지 민족들에게도 민족자결의 가능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는 '조선왕조복원' 요구라기보다 본질은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는 근대적 주권의식 표출이었다.


이 점은 3·1 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군주제'가 아닌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는 사실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이는 조선이란 군주제 신분사회 과거로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민주정 국가형태를 지향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3·1 운동 본질은 왕조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 정치적 자각이었다.


2. 당시 지배층 식민지협력 문제


조선후기 지배층이 백성중심 국가운영에 실패했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국권상실과정에서 당시 양반사대부 고위관료와 양반 지주 계층들은 조선 망국책임에서 진정 벗어나기 어렵다.


또한 일제강점기 동안 일부 고위 인사들은 일본으로부터 귀족칭호 받고, 양반지주계층은 토지소유 상당 부분 인정받으며 경제적 기반을 유지했다. 이들은 식민 통치구조 안에서 일정한 협력 세력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동시에 양반· 지식인계층 중에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들도 소수나마 존재했다.


예컨대 안중근, 안창호, 이회영, 이동녕 등은 기존사회 양반출신이었지만 식민권력에 협력하지 않았다. 또한 김구, 신채호 등도 전형적 양반출신은 아니지만 중인으로서 당시 사회지도층 지식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양반, 지식인은 모두 친일 했다”는 식 일반화는 역사적으로 정밀하지 않다.


내가 전 번 올린 글에서는 전체 양반사대부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글을 썼었다. 그 점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조선양반사대부 상당 수가 식민권력과 결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던 구조적 문제는 분명 존재했었다.


더욱이 해방 이후 이 문제에 대한 철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식민지 시기 협력구조 문제가 현재까지 상당 부분 사회 상층부 잔존한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갈등 한 축이 되고 있다.


3. 민중은 무엇에 저항했는가?


3·1 운동 당시 피해 대부분은 일반 민중에게 돌아갔다.


수많은 사상자와 투옥자가 발생했고, 지방 곳곳에서 무력진압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민중들에 의한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1 운동 당시 일반민중이 저항한 대상은 단순히 국권을 침탈당한 것이나 왕실몰락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반민중들 정치적 무권리 상태, 일제 무단통치, 경제적 수탈이라는 일상의 현실이었다.


즉, 3·1 운동은 단순히 <일제에 대한 민족적·감정적 반발>에 그친 것이 아니라, 주권을 박탈당한 일반민중이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획기적인 민중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4. 결론


'삼일절 노래' 가사는 일부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노래가 기념하려 했던 정신은 단순한 조선왕조 회귀가 아니었다.


또한 3·1 운동은 조선을 다시 세우자는 운동이 아니라 주권을 되찾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지배층은 식민 권력과 협력했고, 다수 민중은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민주공화국을 지향한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3·1절 의미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날>이라는 표면적 기억을 넘어,

한국 근대사에서 국민이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선언한 출발점으로 재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날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매년 3.1절마다 기념식을 반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사적 과제일지도 모른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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