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 지금도 흐른다! 831
초롱초롱 박철홍 지금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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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엄마’, 사랑과 원망 사이 ㅡ
당시 담양에서 최고 미인으로 꼽히던 엄마는 열아홉, 한창 꽃다운 나이에 같은 담양출신 이자 호남최고명문 ‘서중’과 ‘일고’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명문 대학을 다니던 소문난 인재, 내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6·25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은 엄마의 젊고 빛나던 사랑과 기대를 단숨에 무너뜨렸습니다.
엄마는 전쟁통에 첫 딸을 낳았고, 곧이어 다섯 아이 엄마가 되었습니다.
담양에서 수재로 소문난 아버지는 전쟁과 세월의 무게 앞에 주저 앉았고, 물려받은 재산도 모래성 처럼 흩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외부에서 보면 이름만 남은 영광 이었지만, 경제적 실체는 빈 깡통 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엄마는 날 혼낼 때 한탄했습니다.
“내 주변 남자들은 왜 이럴까?
아버지 복도 없는 년이 무슨 남편 복이 있고, 자식 복이 있을까?”
그 말 속에는 원망이, 절박한 생의 의지가 뒤엉켜 있었습니다.
엄마 또한 평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지나왔습니다. 엄마 아버지의 바람과 배신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자란 엄마는, 사랑과 배신 반복 속에서 스스로 지키며 살아야 했습니다.
수재였던 신랑마저 젋은시절 확실한 직업 없이 정치한량으로 무기력하게 시간을 흘려보낼 때, 엄마는 다섯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악착같이 버터야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매일같이 큰소리가 오갔지만, 엄마의 시선은 언제나 자식들에게만 향했습니다.
엄마 자식사랑은 집착이 되었고, 나에게는 지독한 짐이었습니다.
결혼 후 광주에서 살다가 내 일 때문에 다시 담양으로 돌아와, 어린시절 보냈던 집을 허물고 새로 지었습니다.
당시 중·고등학교 학생이던 내 두 아들까지 담양으로 전학시키며 엄마와 함께 살게되었습니다.
얼마 안 가 우리 아들들은 자기들 엄마한테 말했다 합니다.
“우리를 할머니와 같이 살게 한 것이 아빠 인생 최대 실책이에요.”
마눌에게 듣은 그 말 속에 담긴 무거운 진심에, 나는 미안함만 쌓였습니다.
엄마는 남들에게는 정상처럼 보였지만, 내 눈에는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내가 군에 있을 때 이버지와 주고받은 단 한 번 편지 속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를 원망하지 마라. 그래도 니가 엄마 덕분에 큰 탈 없이 자랄 수 있었다. 나였으면 그렇게 못 했다. 엄마는 나 때문에 병이 생겼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좀 있다. 내 친구가 하는 병원에서 진단받은 걸 너도 이해하면 좋겠다.”
마흔이 넘어 다시 엄마와 같이 살게 되면서, 내 어린시절 고통은 또다시 반복되었습니다.
<이제 그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엄마와 내 집사람, 아이들이 함께 사는 집은 긴장과 갈등이 뒤엉킨 공간이었습니다.
그러한 걸 전혀 모르는 엄마도 참으로 불쌍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고, 늘 짜증과 큰소리로 밀어냈습니다.
내 마음 깊이 가슴이 아팠지만,
내 언어로는 뭐라 표현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십 년,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엄마에게 받은 스트레스는 갈수록 원망으로 쌓였습니다. 시간은 엄마를 점점 더 이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엄마는 밖에 돌아다니며 뭔가를 사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습니다. 엄마는 집에 쌓여가는 물건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알뜰한 엄마는 길거리에서 싼 것만 샀지만, 그 집착조차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90이 넘어서야 엄마는 치매가 왔습니다.
집을 찾지 못해 경찰차가 여러 번 데려오기도 했습니나. 하지만 엄마는 요양원 입소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모시기까지 긴 설득과 갈등이 필요했습니다.
요양원에서도 한참 동안은 집에 가야 한다며 차비를 꾸며 다니곤 했다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은 아파왔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년 전부터는 나조차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2025년 8월 25일 새벽 6시 48분, 엄마는 요양원에서 94세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숨이 멎고 있다는 급한 연락을 받고 달려갔지만, 엄마는 이미 숨은 멎어 있었습니다.
이제 엄마는 세상을 떠났고, 숨 쉬지 않는 엄마 모습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평온함 뒤에는 허망함이 스며 있었습니다. 오직 자식만 바라보며 살아온 엄마의 생은, 요양원에서 홀로 맞이한 허망한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치매로 인해 그 허망함도 모른 채 떠나셨기에, 나는 다행이라고 위안합니다.
자식밖에 모르는 엄마의 지독한 집착적 사랑은 내게 돌처럼 무거운 짐이었고, 엄마의 큰 사랑 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옭아맨 슬픈 사랑이었습니다.
엄마 아빠의 부부관계 냉담함 속에서 자란 나는,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내 평생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사랑과 원망이 뒤엉켜 있습니다.
엄마가 남긴 사랑은 얼마나 무겁고 모순적인지,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한때 엄마가 돌아가시면 회한으로 많이 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눈물은 별로 나지 않았습니다.
이 엄마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내 삶을 지탱해 주었지만, 동시에 나를 옭아맨 사랑.
이제사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엄마에 대한 회한은 내 남은 삶을 계속 따라다닐 것입니다.
엄마가 남긴 사랑과 원망은 한 몸처럼 얽혀,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 나와 함께할 것입니다.
엄마, 이제 편안해지셨겠죠?
그 긴 세월의 무게를 내려놓고,
엄마의 깊은 외로움 속에서도 엄마가 그래도 엄마만의 사랑으로 나를 키웠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뵈도 나는 불효한 자식이었습니다.
그래도 엄마의 그 병적인 자식 사랑으로 엄마 마음을 짓누르지는 말았음 합니다.
엄마!
잘 가셔서 편안히 쉬세요.
ㅡ 초롱박철홍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