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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우 Sep 05. 2017

수줍은 캐럽 나무의 세계여행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



  어느 금요일 오후. 주방에 나와보니 셰프가 시골에 가야 하는데 누굴 데려갈지 고민이라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래 봤자 주방엔 달랑 셰프와 수셰프, 그리고 있으나마나 한 실습생인 나까지 달랑 세 명뿐. 셰프는 능청맞게 웃더니 나를 지목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나와 셰프, 그리고 셰프의 여자 친구인 글로리아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도시 경계만 살짝 벗어나면 끝없는 들판과 밭이 펼쳐진 시칠리아에서 비 시골과 시골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어느 외딴 농장이었다. 웬 노부부가 나오더니 글로리아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그녀의 삼촌이 운영하는 개인농장으로 여기서 때마다 제철 식재료를 받아오고 있었다. 이날 목적은 수확철을 맞은 카루보 Carrubo 열매. 종종 레스토랑에서 고기 요리의 소스로 사용하던 카루보 꿀의 재료였다.



  이탈리아에서 카루보 Carrubo라 부르는 이 나무는 영어로 캐럽 Carob이다. 다이아몬드의 단위로 쓰이는 캐럿 Carat의 어원이 바로 이 나무 열매의 씨앗에서 유래됐다. 열매는 크기가 제각각이지만 씨앗의 크기와 무게는 0.2g으로 항상 동일해 값비싼 귀금속의 무게를 잴 때 이 캐럽 씨앗을 기준 삼아 중량을 측정했다. 뿐만 아니라 금의 순도를 나타내는 K(Karat)도 캐럽과 관련이 있다. 어른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캐럿 열매가 최대 24개. 그래서 100퍼센트 순도의 금을 24K라 부른다.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캐럽 나무는 수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류와 함께 해왔다. 캐럽 나무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꽤 흥미롭다. 기후에 민감한 수줍은 나무 치고 그 여정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캐럽 나무의 고향은 중동지방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대인이 쓴 탈무드와 성경에도 자주 언급될 만큼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캐럽 나무의 유용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캐럽을 그리스에 옮겨 심은 것이 여행의 시작이다. 그리스인들은 열매와 씨, 목재까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캐럽 나무를 그들의 식민지 곳곳에 가져다 심었다. 시칠리아도 그중 하나였다. 시칠리아는 무더운 기후와 적은 강수량을 필요로 하는 캐럽 나무에게 자라기 좋은 환경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비옥한 시칠리아에 캐럽 나무와 더불어 올리브와 레몬, 밀 등 각종 작물을 심었고 그 수확물을 본국으로 보냈다. 



  캐럽 나무는 콩과 식물에 속한다. 콩류 작물은 공기 중에 있던 질소를 땅속뿌리에 고정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어 주변의 지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로 콩과 식물과 다른 작물을 교대로 재배하거나 주변에 심는 것이 오래된 농업 방식이었다. 품질 좋기로 유명한 시칠리아의 레몬과 올리브 나무 주변에 캐럽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반면 옥수수는 콩과 반대로 땅 속의 질소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어 남미에서는 전통적으로 옥수수와 콩을 함께 심었다.


 그리스인들 뿐 아니라 아랍인들의 캐럽 사랑도 각별했다. 수줍은 캐럽 나무는 아랍인들의 유럽 진출과 함께했다. 그들이 점령한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흘러가 자리를 잡았다. 지중해를 넘나들던 캐럽 나무는 시간이 흘러 대서양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스페인의 신대륙 진출과 함께 멕시코와 남아메리카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영국인들은 본국에선 자라지 않는 이 나무의 경제성을 눈여겨보고는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북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 인도, 호주에 캐럽 나무를 심었다. 1870년대에 이르러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캐럽 나무 재배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다. 




  캐럽 나무 열매는 꼭 큰 콩깍지처럼 생겼다. 길쭉한 모양 탓에 메뚜기를 닮아 메뚜기 콩 Locust bean이라고도 불린다. 여름 끝자락이 되면 콩깍지는 갈색으로 변하면서 딱딱해진다. 이 갈색의 깍지를 한입 베어 씹어보면 꽤 강한 단맛이 난다. 말린 대추와 캐러멜 사탕을 통째로 씹는 맛이랄까. 예로부터 카루보 열매를 씹으면 목소리가 더 고와진다는 속설이 있어 가수들이 카루보 열매를 애용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사탕수수처럼 천연의 당분을 가지고 있는 캐럽 열매는 주로 시럽으로 만들거나 가루를 내 카카오가루 대용으로 쓰인다. 초콜릿의 주원료인 카카오 빈이 23%의 지방과 5%의 당분을 갖고 있는데 비해 캐럽 열매는 7%의 지방과 45%의 당분을 함유하고 있다. 풍미는 비슷하면서 절반만 사용해도 동일한 단맛을 내기 때문에 경제적인 가치가 높다. 특히 알레르기 반응도 없고 카페인도 없어 당뇨환자들을 위한 초콜릿 대용품 등 건강식품으로도 제법 인기가 있다. 캐럽 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비스킷을 만들기도 하며 씨앗은 제빵이나 아이스크림, 분자요리 등에서 안정제, 증점제 등으로 사용되는 로커스트 빈 검(LBG:Locust bean gum)을 만드는 주재료로 쓰인다. 꽃에서는 캐럽 향을 간직한 진한 풍미의 캐럽 꿀을, 나무는 단단한 목재로도 사용한다. 말 그대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 할 수 있다. 



   캐럽 열매로 시럽을 만드는 일은 꽤 많은 수고를 요하는 일이다. 수확해 주방으로 옮겨온 캐럽 열매는 잊을만하면 주방 직원들을 괴롭히곤 했다. 시럽을 만들기 위해선 먼저 캐럽 열매를 깨끗이 씻은 후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말린다. 며칠간 밖에서 말린 캐럽 열매를 오븐에 넣고 한 번 열을 가해준다. 캐럽 열매의 풍미를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이다. 가볍게 토스팅 Toasting 된 캐럽 열매는 일일이 손으로 부러뜨린 후 큰 냄비에 물과 함께 담아 약 3일에 걸쳐 끓이면 끈적한 시럽이 완성된다. 달짝지근함과 동시에 쌉싸름하고 약간의 신맛이 적절히 어우러진 풍미를 낸다. 


주로 고기 요리의 소스로 쓰이는데 마치 우리네 불고기 소스와 비슷한 맛을 낸다. 캐럽 수확철이 되면 인근 상점들에서는 캐럽 시럽을 병에 담아 파는데 흡사  우리네 시골 장터에서 집집마다 짜낸 참기름병을 내다 파는 것 같은 풍경이 그려진다. 이렇게 버릴 것 하나 없는 캐럽 나무를 볼 수 없다는 게 아쉽기만 할 뿐이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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