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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Oct 20. 2021

여름 도둑 4

이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https://brunch.co.kr/@redangel619/335





4


복숭아 냄새


물개의 입술은 의외로 가슬가슬했어. 미숙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촉감. 조용하지만 장난스러운 남자애 같았어. 재밌는 걸 처음 배우는 학생처럼 신이 난 표정이 예뻤어. 그애의 위에서 나는 아주 여러 번 눈을 떴어. 그애는 그때마다 꿈꾸듯 눈을 감고 있었고. 씻어도 계속 나던 복숭아 냄새처럼, 숨을 줄 모르는 솔직한 소리들이 방안에 가득찼어. 아무리 옷을 다 벗고 몸을 맞대고 섞인 땀이 흘러도, 끝까지 벗지 않은 무언가가 이물감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 근데 물개랑은 그런 게 없었어. 서로 모르는 것들이 무지 많은데도, 이상하게 그애랑 섹스를 할 때면 늘 끝까지 다 벗어버린 느낌이었어. 그래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느낌. 그래서였을까. 나는 언제나 거리낌이 없었고, 그애는 그런 거에 환호했어. 우리 둘의 절정이 모두 끝나고도 그애는 오랫동안 내 안에서 나가지 않았어. 너무 따뜻해서 끌어안고 한참을 있었어.


“입에서 복숭아 냄새가 나.”

“내 입에서? 아님 누나 입에서?”

“잘 모르겠어. 넌 안 나?”

“복숭아 냄새랑은 좀 다른데, 누나 목이랑 팔목에서 항상 좋은 냄새가 나.”

“어떤 냄새?”

“설명을 잘 못하겠는데, 누나 만날 때마다 항상 나는 냄새가 있어.”


내 몸에서 나는 특별한 냄새가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물개가 말한 냄새는 아마 향수 냄새였을 거야. 내가 좋아하는 향수 알지? 끌로에 러브. 너도 한 번 사줬었잖아. 내가 그 향이 젤 좋다고 했더니 예전에 태오가 출장갔을 때 면세점에서 몇 병을 한꺼번에 사왔던 적이 있었어. 그땐 늘 그걸 뿌렸었거든. 그 향을 맡으면서 태오 생각을 하는 게 좋아서. 지금도 가끔 그걸 뿌리는데 그럴 때마다 조용히 그 애 목소리가 들려.


“누나 목이랑 팔목에서 항상 좋은 냄새가 나.”


근데 그 향수, 이제 단종이라 안 나온대. 지금 딱 한 병 남아 있어. 최대한 아껴 쓰고 있는데, 할머니가 될 때까지 가끔은 뿌리고 싶은 향이야. 이제 안 나오는 거라니 더 좋아졌어. 좋아하는 마음이 끝나지 않았는데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만큼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게 또 있을까.


“난 여자가 내 위에서 그렇게 하는 거 처음 봐.”

“그래? 그렇게 하는 거? 풉. 난 항상 그렇게 하는데?”

“진짜?”

“큭크크 넌 스물 일곱 살 되도록 뭐 했어?”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눈을 똥그랗게 뜨는 물개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걔 얼굴을 내 가슴에 품듯이 끌어 안았어. 처음으로 그렇게 남자를 안아봤어. 파고들어 안기는 사람은 항상 나였는데, 새로운 역할에 기분이 이상했어.


그렇게 정든 애인인 양 끌어 안고 섹스를 했는데, 이상하게 같이 누워 자려니 불편했어. 섹스의 욕구와 동침(성교가 없는)의 욕구는 의외로 상반된 거라며 섹스를 끝낸 후엔 늘 애인을 보내고 혼자 잔다는 어느 소설 속 남자의 독백이 떠올랐어. 내가 계속 뒤척이니까 눈치 빠른 물개가 침대 밑으로 내려갔어. 그러고 나서야 겨우 잠들었어. 물개 팔을 베고 편하게 스르르 잠들 때까진 꽤 시간이 오래 걸렸어.



여름


그날 이후부터 물개는 내 오피스텔에 자주 왔어. 나는 그때 파트타임으로 화, 목만 학원을 나가고 있었고, 나머지 시간엔 과외만 몇 개 하고 있었거든. 물개는 모 공기업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라 개인 병원에서 전공 관련 알바 하나만 하고 있었고. 얼른 결혼을 해야하고 얼른 취업을 해야한다는 것만 빼면, 우리는 무지 자유로웠어. 완전한 학생도, 완전한 직장인도 아닌 무소속인데 어디서 마지막 여름 방학을 공짜로 선물 받은 사람들처럼 들뜨고, 하루하루가 신났어.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안 하고 걔랑 놀기만 했으면 좋았을 걸 싶어. 여름엔 여름을 보내고, 가을엔 가을을 보내야 하는데. 그땐 잘 몰랐어. 가을을 대비하는 것 때문에 만끽하지 못한 여름의 며칠을 후회하게 될 줄은. 여름의 충만한 여운으로 쌀쌀한 가을을 짙게 음미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땐 아무 것도 몰랐어. 지가 이쁜지 모르는 애들이 젤 이쁜 것처럼, 아까운지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낭비해버린 그 해 여름은 지금까지 내가 보낸 여름 중 젤 이쁜 여름이었어.


종종 둘이서 수영장에 갔어. 거기선 좀 포지션이 바꼈어. 내가 배우고, 물개가 가르치고. 아침 일찍 물개가 우리 집으로 오면, 내 차에 물개를 태우고 고리원자력발전소 수영장에 갔어. 가격도 무지 싼데, 사람도 별로 없어서 우리가 거의 전세낸 것처럼 차지하고 놀았지. 물개는 수영장에서 과연 물개였어. 오리발까지 가져와서 접영도 하더라구. 지금 생각해 보니까 걘 일부러 그렇게 자주 날 수영장에 데려간 것 같아.


수영복을 갈아입고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오던 큰 상체와 긴 다리,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얼굴. 자유형 자세를 교정해 준다며 내 팔을 잡아서 돌리던 손. 그런 것들이 생각 나. 25M 레일을 자유형으로 배영으로 평영으로 몇 번씩 왕복하고 있으면 물개가 레일 끝에서 기다리면서 선생님처럼 피드백을 해줬어. 그리고 한참을 말 없이 각자 왔다갔다 하기도 하고. 마지막에 내가 먼저 지치면 레일 끝에 앉아서 물개가 접영을 하는 걸 구경했어. 멋졌어. 박자에 맞춰 커다란 어깨가 물밖으로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는 걸 한참 동안 보고 있었지. 물소리밖에 안들리는 수영장 특유의 투명한 공기, 물이 방울져 흘러내리던 그애의 등과 다리, 의식할 때마다 짙게 나던 락스 냄새. 그런 것들이 물기가 묻은 깨끗한 화면처럼 남아 있어.


배영 자세로 누워서 팔은 젓지 않고 발만 차면서 혼자 생각에 빠질 때도 좋았어. 까마득하게 높은 수영장 천장을 보고 있으면 종종 네가 생각났어. 그날도 우린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 둘만 있었잖아. 그날 말야. 그날이 없었다면 괜찮았을까. 아님 나중에라도 내가 그 날에 대해 뭐라고 말했다면 좀 달랐을까. 나는 그날 네가 나한테 한 행동이 혐오스럽다거나 징그럽다거나 그렇진 않았어.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랑 입을 맞추는 것처럼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어. 설명하기 어려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라 어디다 비유를 해야할지 모르겠어. 나는 무서웠어. 잘 못하는 비위 맞추기라도 하며 어떻게든 네 옆에서 버텨보면, 너도 예전처럼 나를 대해줄까 고민도 했고. 너는 그때 내게 애인 이상이었어. 나를 좋아하는 그 어떤 남자보다 더 내 얘기를 잘 들어주고, 어떤 시기나 가식도 없이 내가 좋아하는 걸 같이 좋아해 줬었잖아. 나는 너 같은 애는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너랑 멀어지면 인생이 끝장날 것 같았거든. 그날 이후로 너한테 어색하게 굴었던 건 다 그런 거 때문이었어. 너는 끝까지 내가 너를 거절해서 네가 상처받았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상처를 받은 건 너만이 아니었어. 그렇게 내 모든 걸 네 일처럼 이해해 주던 네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는 게, 나는 그런 게 너무 무서웠어. 나도 너와 같은 방법으로 너를 좋아해 주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있던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니가 나한테 거리낌없이 듬뿍 주던 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었어. 나는 정말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었거든.


나중에 무서움이 좀 사라지고 나니까 솔직한 내 마음을 알겠더라. 그날 네가 나한테 그런 것 때문에 우리가 다시 가까워질 수 없다 해도, 그날 이전에 네가 나한테 줬던 것까지 다 너한테 돌려주고 싶진 않았어. 그 전에 우리 사이에 있었던 것들은 전부 그대로 두고 싶었어.  지금 너한테 내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  네가 날 어찌 생각하든 다 포기했지만, 내가 너를 생각하는 감정의 종류가 너와 다르다고 해서 내 감정의 크기나 무게나 깊이 같은 걸 폄하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네가 그랬듯, 나도 항상 너한테 진심이었어.


사귄다 사귀지 않는다. 애인이다 애인이 아니다. 이런 걸 정확히 선긋기가 난 늘 싫었어. 무지개에다 구분선을 긋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빨간색이야! 라고 하는 것처럼 억지스러워서. 난 뭐든 그런 식으로 규정하는 게 싫거든. 그렇게 선을 그어버리면, 빨간색이 점차 주황색으로 바뀌는 순간순간을 놓치잖아. 그런 걸 놓치는 게 늘 아까웠어. 물개와 나는 뭐였을까. 그런 건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 걔가 좋아하는 게 꽤 많긴 했어. 하지만 걔랑 같이 있을 땐, 특히나 몸을 맞대고 있을 땐 말야, 무언갈 좋아하고 무언갈 추구하고 그런 정신적인 것들이 말할 수 없이 시시하고 알량하게 느껴졌어. 같은 해를 보고, 같은 모래에 뒹굴고, 같은 바닷물로 몸을 적시며 자란 존재와 이마를 맞대고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는 것 같은  원초적인 친근감이 느껴졌어. 우린 그런 사이였어.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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