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비나 Jan 08. 2022

여름 도둑 6

이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https://brunch.co.kr/@redangel619/347





6.


한낮의 햇볕


  

  준섭 오빠와의 썸이 익어갈 때. 그때 물개는 자기 집보다 우리 집에서 더 자주 잤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더 이상 누나라고 부르지 않고 서연이라 불렀고.


  같이 자고 일어나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헐! 지금 열 한 시야? 나 아홉 시에 면접 스터디 있었는데 깜빡했어.”

“어떡해? 너 왜 자꾸 그래……”

“몰라. 나 완전 홀린 사람처럼, 정신이 없어.”

“지금이라도 가야 되는 거 아냐?”

“벌써 다 끝났는데 뭘 가~~”


물개는 잠깐 자책을 하다가 금방 표정이 바뀌어서는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방긋 웃고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커피잔을 뺏아 아일랜드 식탁에 툭 놓아 버렸어. 그리고 앉아 있던 나를 번쩍 마주 안아 침대로 데려 갔어. 그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로를 꽉 안고 있는 대로 입을 맞췄지. 1초도 지루할 틈이 없이 말야.


  사람을 너무 다양한 감각으로 기억해 놓으면, 두 사람의 몸이 마음 이상으로 너무 친해지면, 잊는 데 참 방해가 돼. 물개가 그랬어.


  그렇게 한참을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상쾌하면서도 나른해지는 시간이 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럴 때 나는 자주 잠이 들었어. 잠들지 않았을 땐 옆으로 누워서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어. 그때 내 방에 있던 좁은 슈퍼싱글 침대가 우리를 더 가까이 있게 해 줬어.


  그때 걔가 내 눈을 쳐다보며 꿈꾸듯 한 말들이 있었는데 그건 아무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아. 나한텐 그 장면이 무지 이뻤는데, 그걸 말로 해버리면 그 이쁨이 어째 좀 사라지는 것 같고 망가지는 것 같아서. 그냥 흔한 연애 장면 같아보여서 몇 번을 썼다가 지웠어. 절대 꺼내지 말고 마음에만 담아두고 혼자서만 가끔 꺼내봐야 하는 그런 장면들이 있나봐. 누구에게도 뺏기거나 왜곡당하고 싶지 않은, 나 혼자만 해석하고 싶은. 그런 장면들이 있나봐


  왜 그렇게 흔해빠진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걸까. 나를 그렇게 각별하게 흔들던 것들은 돌이켜 보면 왜 그렇게 하나도 특별해 보이지가 않는 걸까. 그 순간에 느꼈던 건 ‘진짜’였거든. 하고 진지하게 누구인지 모를 누군가를 설득해내고 싶어질 때가 있어.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런 걸 쓰고 있나봐.


  바탕과 같은 색의 꽃이 수놓아진 아이보리색 린넨 커튼을 겨우 통과해 은은하게 우리의 알몸을 안아주던 한낮의 햇볕이 생각나. 딱딱하고 뜨거운 어깨를 잡고 목에 키스를 하다가 눈을 치켜떠서 그애의 얼굴을 올려다보면, 가무잡잡하고 부드러운 뺨위로 돋아있는 가는 솜털들이 보였어. 평소에는 보이지 않고, 민감히 만져봐야 연하게 느껴지는.




  겨울의 시작


  날씨가 더 차가워졌어. 딱 지금 쯤이었던 것 같아. 완전히 겨울 옷을 입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가을 옷을 입으면 추운. 준섭 씨를 준섭 오빠라 부르게 됐고, 물개는 어쩐지 조금은 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도서관에 자주 가서 오래 있곤 했어. 나를 안고 있다가 스터디 가는 걸 까먹었다며 놀라는 장면 같은 건 더 이상 보지 못했어. 옷이 두꺼워진 것처럼 그 무렵의 물개는 무거워 보였어. 아버지 일이 수금이 어려워져 엄마가 힘들어 한다고, 그래서 알바를 하나 더 할까 싶다고. 이전에는 전혀 하지 않았던 그런 얘기들을 이따금씩 하기도 했고.


  준섭 오빠는 이 정도면 우리가 많이 가까워졌고, 내가 자기에게 어느 정도는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는지 가까운 데로 바람을 쐬러 가자고 하더라. 알겠다고 했어.


  물개 때문에 더 이상 만나지 않았던 남자들과 다르게 준섭 오빠는 결혼으로 타협할 만한 여지가 있었어. 내 말을 물개보다 잘 알아 들었고, 내 성격에 대한 환상이 없었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태오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이 알아 차린 것 같았어. 나를 이뻐하는 포인트도(물개만큼은 아니지만) 단순하지 않아서 좋았어. 편했어.


  크게 웃을 때 쨍 하게 보이는, 그래서 좀 세속적인 인상이라는 느낌을 주는 금니나 좀 지나치다 싶은 정치에 대한 관심. 그런 것들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다른 장점들이 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길만 했지.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물개랑 결혼을 할 순 없으니까 언젠가는 물개는 정리를 하고 꼭 준섭 오빠가 아니더라도 이런 비슷한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게 좋겠다는 나름의 계산 같은 걸 하고 있었던 것 같아. 타협이나 계산.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었어.


  “파도 소리 좋아한다고 했지? 울주 쪽인데, 바다가 바로 코앞이라서 잘 때 파도 소리가 들리는 덴데, 서연이랑 꼭 거기 가고 싶어. 좋아할 껄? 소고기 돼지고기 조개 새우까지 맛있는 거 오빠가 제대로 세팅할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음 다 말해.”


준섭 오빠가 이렇게 말하는데, 이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게 새삼 느껴지면서, 물개가 떠올랐어. 머리로 정리한 것과 다르게 자꾸 신경이 쓰인달까. 물개를 만나면서 애인 비슷한 단계까지 갔던 남자들이 꽤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신경이 쓰인 건 처음이었어. 그래도 준섭 오빠랑 멀어질 생각이 그땐 전혀 없었어. 오히려 물개를 정리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억지로 했던 것 같아.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Going Home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