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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영 Nov 09. 2024

배낭은 동키로 보내기로 했다1

23.09.21 에스테아 – 로스아르코스


  배낭은 동키로 보내기로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길이다보니 걷다보면 등 뒤로 해가 떴다. 눈앞은 아직 캄캄한 밤인데, 등 뒤로 하늘이 밝아졌다. 그리고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나를 이끌었다. 그림자를 따라 걷다보면 금세 아침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자꾸 뒤를 돌아보며 사진을 찍었다. 저녁 노을 같기도 하고, 아침 해 같기도 한 하늘이었다. 


  참, 여성 전용 숙소를 예약했지만 코골이는 똑같았다. 조금 과장을 덧붙이자면, 이전보다 더한 코골이였다. 이제 잠귀에 글로벌한 코골이가 익숙해져가길 바랐다. (실제로 이후부터 귀에 익어 또는 그만큼 피곤했는지 상관없이 잘 잤다.) 






  에스테아에서 로스아르코스로 가는 길에는 유명한 명물(?)이 두 개 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아르체 와인 하나만 알고 있었다. 유명한 대장간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정보는 모른채 길을 나섰다. 조금 걷다보니 곧바로 대장간이 나왔다. 이른 아침 시간인데도 대장간은 불이 환했고, 그곳에서 만든 여러 가지 장신구와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가판대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성격이다. 무얼 사지 않아도, 무엇이 있는가 꼭 살펴보고 지나가는 편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여기는 순례길 위이니 이번에는 뭐라도 꼭 사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펴봤다. 그러나 아직 길 초반, 몸이 힘들어서인지 모든 것이 밋밋해보였다. 괜찮다, 싶은 제품도 있었으나 이내 저걸 사서 어따 써, 하는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또 그냥 나오기는 밋밋해서 순례자 여권에 도장 하나 받아서 나왔다. 마치 처음부터 도장만 받으러 온 사람이었던 듯.






  이어서 등장한 아르체 와인!! 제일 기대했던 곳이었다. 공짜 와인이라니. 스토리를 잘 알지 못했을 때에는 순례길 위의 무료 와인이라니 낭만있다고만 생각했다. 이곳은 원래 수도원이었다. 그리고 수도원에서는 순례객들을 위해 늘 음식을 준비해서 나눠주곤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수도원은 쇄퇴하고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이 수도원 건물을 한 와인회사가 샀다. 그리고 수도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순례객을 위해 와인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쓴 정보라 사실과 약간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들었던 얘기가 와인을 너무 많이 담아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루 제공 와인의 양은 정해져 있어서, 오전에 너무 많이 가져가면 오후에 이곳을 지나게 되는 순례객은 맛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 말이 이 길 위에서는 무엇이든 그 순간에 즐기라는 말 같았다. 지금, 내가 있는 여기, 그 순간을 즐기자. 그리고 담아두지 말고 털고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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