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샘 Jan 31. 2020

잠을 안 재우는 고문

 모든 부부가 그러하듯, 우리 부부도 수많은 희로애락과 그 보다 더 많은 고비를 겪으며 십 년이 넘는 세월이라는 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나보다 먼저 결혼한 지인들에게 시어머니 때문에 고통스럽다며 과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조언을 구하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건네는 말은 ‘남편은 뭐 하고 있니?’다. 뭐, 이해한다. 나 역시 남들이 같은 고통을 호소할 때 가장 먼저 한 말이 ‘남편은 뭐하고?’ 였으니까.


 시어머니가 나에게 소위 갑질을 하실 때, 남편은 자고 있거나 일하고 있었다.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남편은 친구와 사업을 하다 실패했다. 사업을 시작한 몇 년 뒤 동업을 했던 남편의 친구들은 남편에게 수억의 빚만 남기고 자기 살 길들을 찾아 떠났다. 남편은 사람 꼴이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남편의 일이 안 풀릴 때마다 나의 속옷을 가져가 얼굴도 이름도 모를 스님에게 갖다 주며 태웠다. 남편의 일이 안 풀리는 것은 내가 삼재라서 그렇다며. 삼재는 3년만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들 삼재며 날 삼재며 이름 모를 삼재가 줄줄이 9년 동안 계속될 수 있다는 것도 시어머니의 닦달을 통해 알았다. 천주교인인 나는 그런 것들을 믿지 않지만 내 속옷이라도 태워서 시어머니의 마음이 편해지신다면 그렇게라도 하시라고 맞춰드렸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안 그래도 사입을 돈도 없는데 점을 보고 올 때마다 구멍이 나도록 입고 있는 너덜너덜한 내 속옷을 정체모를 남자 손에 쥐어주며 태우는 것도 정말 구역질이 날만큼 지겨웠다. 내가 이제 그만하시라며 속옷을 드리지 않으면 몰래 내 옷장에서 속옷을 가져가셔서 ‘내가 니 속옷 가져가서 태웠다’고 통보를 하셨다.


 시어머니가 나의 삼재 탓을 하는 그 힘든 좌절을 남편이 이겨내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나는 너무 두려웠다. 내 주변에는 이미 사업 실패로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한, 그러니까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 몇 있었다. 가장 가깝게는 사촌오빠가 그러했다. 남편도 그렇게 될까 봐 너무 두려웠고 그래서 모든 고통은 나 혼자 조용히 감내해야만 했다. 남편에게 더 힘든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았고 내가 애쓰는 모습과 우리가 잘 사는 모습을 보이면 시어머니도 안심하시고 괴상한 말과 행동은 더 이상 안 하실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기괴함에 대해 남편에게 전부를 전하지는 않았다. 우리 부부는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버거워서 시어머니의 패악은 뒷전이었다.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시어머니는 선을 넘는 말과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가 잠자는 것만 보면 심술이 나서 못 자게 하는 시어머니의 행동이었다. 당시 젖먹이였던 아들은 예민해서 낮에도 잘 안 자고 밤에도 눕히기만 하면 울었다. 품에 안고 서서 도닥도닥해주어야 겨우 잠을 자던 시기였다. 아이가 우는 소리에 가족들이 깰까 봐 나는 밤새 서서 아이를 안고 달래느라 밤을 새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기에 아침에라도 잠깐 눈을 붙이고 가려하면 시어머니가 이불을 확 벗기며 소리를 질렀다.

“애가 잔다고 너도 자지 말고 반찬을 만들거나 청소를 하라고!”

그렇게 며느리가 자는 꼴은 못 보는 양반이었지만 당신 아들이 잘 때는 방문 손잡이도 못 잡게 했다. 잠자는 방의 문손잡이만 잡아도 그 방에 왜 들어가냐며 호통을 치는 통에 방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그 시절 나는 거의 잠을 못 자고 퀭한 눈과 몽롱한 상태로 수업을 하다가 눈을 뜬 채 졸며 수업을 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언젠가 또 열흘 정도 잠을 못 자다가 하루는 아이도 나도 거의 기절한 듯 잠든 날이 있었다. 아이가 깨서 울지 않으니 덕분에 나도 잤다. 다음 날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밤 11시가 넘어 퇴근한 밤 시어머니의 폭언이 이어졌다. “미련 곰탱이 같은 게 잠만 퍼질러 자느라 애 기저귀에 오줌 새는 줄도 모르냐”고. 옆에 있던 시아버지는 “어차피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인데 왜 그렇게 아끼냐”고 했던가? 아이가 오줌을 싸서 기저귀가 젖는 줄도 모르고 자는 건 그 양반들의 아들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그 양반들이 나한테 폭언을 하는 시간에도 그분들의 아들은 자고 있었다.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방에 들어가니 남편은 역시나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혼자 분을 삭이다가 그 와중에도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이 너무 얄미워 남편을 발로 찼다. 자다가 놀라서 깬 남편이 왜 그러냐고 소리를 질렀다. 밤 1시였다. 조용히 혼자 나가서 맥주를 사 가지고 집 앞 놀이터로 갔다. 그 밤에 혼자 토해내듯 울었다. 언제쯤 이 고통이 멎을까 생각하며. 그 집에서 아이만 데리고 나온 후 불을 지르고 싶었다. 그 후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 놀이터에서 놀자고 해도 나는 그 놀이터에는 가기 힘들었다. 그곳에 가면 그 밤에 혼자 앉아 울고 있는 내가 보였다.


 아이가 세 살 무렵인가 한 번은 새벽에 시어머니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셔서 나를 깨웠다. 빨리 당장 일어나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라며. 아이는 내 품에서 푹 잠들어 있었다. 잠자고 있는 아이를 깨워 얼른 젖을 먹이라는 것이었다. 자다 깨서 어안이 벙벙하여 앉아있는데 시어머니의 채근하는 소리에 남편마저 일어나 상황을 파악하더니 무슨 짓이냐고 시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소란스러움에 잘 자고 있던 아이마저 깨어 뒤척거렸다.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쯤 되었다. 아이는 이미 젖을 끊은 지 한참 되었을 무렵이다. 나는 시어머니가 혹시 치매일까 두려웠다. 남편에게는 차마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게 벌써 7년 전쯤 일이니 시어머니가 치매는 아니었나 보다.




이전 02화 하늘이 내린 용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