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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샘 Feb 01. 2020

내 안의 악마


 수녀님에게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시어머니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니 지인이 수녀님과 상담을 권했다. 그래서 나를 주일학교 교사로 끌어주신 수녀님께 상담을 요청했다. 수녀님께서는 시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하셨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형적인 시어머니세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표독스러운 시어머니. 그래도 결혼하고 처음엔 관계가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시어머니 인상이 워낙 쎄 보이셔서 결혼식 날 친구들이 ‘너희 시어머니가 너 잡아먹을 것처럼 생겼다’며 제 걱정을 하긴 했지만, 인상과 다르게 잘 대해 주셨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폭언과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시는데 나중에는 감당이 안되더라고요.”

“아팠을 시간일 텐데, 묻기 조심스럽지만 어머니랑 있었던 일 중 생각나는 걸 말해 줄 수 있겠어요?”

“결혼하고 남편이 생활비를 가져다준 적이 없어요. 남편한테 힘든 일이 있어서 저도 바라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아이를 갖기 전에 출산할 동안 쓸 생활비까지 제가 다 벌어놓고 아이를 가졌어요. 아이를 낳자마자 시어머니한테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해야 했고요.”

“많이 힘들었겠네요.”

“시어머니도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시어머니도 일을 하셨고 시가와 신혼집은 1시간 거리였는데 저희가 서울로 가기 전까지는 출퇴근을 하며 아이를 봐주셨거든요. 그런데 시어머니는 힘든 일이 생기면 다 저한테 푸시더라고요. 전 시어머니의 감정 쓰레기통이고 그 집안의 노예가 된 기분이었어요. 저 역시 신혼집에서 일하는 곳까지 왕복 3시간 반의 거리를 다니며 일을 해야 했어요. 입덧이 무척 심했는데 입덧을 할 때도, 만삭이 되어 출산하기 5일 전까지도, 아이가 젖먹이 일 때도 먼 거리를 다니며 일을 했어요. 아이가 무척 예민한 아기였어요. 밤낮으로 잘 안자는 건 둘째치고 젖병을 아예 거부해서 분유는커녕 모유도 꼭 직수를 해야만 먹었거든요. 그러면 제가 출근하고 난 뒤로 대략 12시간을 그 어린 아기가....”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녀님께서 휴지를 건네주셨다.

“죄송해요. 이건 시어머니 때문에 우는 건 아니에요. 그냥... 아기가 하루 종일 굶은 걸 생각하면... 이제는 컸는데도.. 엄마인 제가 죄인 같아서.. 너무 미안해서...”

“이해합니다. 눈물이 나면 마음껏 울어도 괜찮아요.”

“아니에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뱉어냈다  

“진정됐습니다.”

입술에 어색함이 묻은 옅은 미소를 한 번 적시고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늦게까지 수업을 하고 퇴근하는 길에는 항상 젖이 퉁퉁 불어 있었어요. 대략 12시간가량 젖을 먹이지 못했고 여기저기 남의 집으로 수업을 다니는 처지라 유축을 하는 것도 힘들었거든요. 젖이 불어 너무 아프고, 옷까지 젖어 남들이 볼까 봐 걱정되고, 무엇보다 종일 굶었을 아기 생각에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그래서 그 늦은 밤에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는 척하며 소리 없이 울었어요.”

수녀님이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계셨다.

“그날도 그렇게 울다가 지하철에서 내려선 아기에게 빨리 젖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날다시피 뛰어들어갔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기에게 젖부터 물렸지요. 그런데 허겁지겁 와서 젖을 먹이고 있는 저한테 시어머니가 표독스럽고 차가운 말투로 그러셨어요.”

말을 다시 멈추고 작은 숨을 몰아 쉰 후 시어머니의 말투를 되새김질하여 뱉어내듯 말했다.

“ ‘너, 어디 클럽 같은 데서 친구 만나서 놀다가 들어온 거 아니냐?’ 전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그래서 ‘네? 뭐라고요?’ 하고 물으니, 제 모습을 아래 위로 한번 훑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아니다. 됐다. 니 꼬락서니를 보니 그런 데서 받아 줄 꼬락서니도 아니다.’”

이상하게 시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침착해지고 냉정해진다. 책상 위에 있는 아까 적신 휴지 뭉치를 보며 말하다 고개를 들어 수녀님을 봤다. 놀란 눈을 한 채 벌어진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계셨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조용히 수녀님이 말씀하시길 기다렸다. 그런데 수녀님이 한숨을 쉬시더니 조용히 눈물을 닦으셨다. 이번엔 내가 놀랐다.

“선생님이 너무 담담하게 말씀하셔서 더 가슴이 아프네요.”

수녀님은 몇 차례 한숨을 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씀하셨다.

“젖먹이를 둔 엄마한테.. 휴... 그건 사람이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네요. 선생님이 고통스러워하는 건 너무나 당연해요. 그런 상황에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영혼에 상처를 입겠어요.”

“수녀님, 전 시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싶었어요.”

차마 수녀님의 눈을 마주치기도 버거워 나는 고개를 돌리며 힘겹게 말했다. 수녀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셨다.

“진짜로 조른 건 아니잖아요.”

“진짜로 목을 조른 건 아니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제 자신에게 너무나 충격이었어요. 시어머니가 제 안에 저도 모르고 있던 악마를 깨우는 기분이에요. 시어머니가 무서운 게 아니라 시어머니 때문에 변해가는 제가 무서워요.”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선생님의 시어머니는 치료가 필요해요.”

“주님은 그래도 용서해야 한다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겠죠? 하지만, 전 도저히 못하겠어요.”

“선생님의 시어머니가 그런 분이시라면 마냥 용서만 할 수는 없어요. 그분이 치료를 받으시고 선생님에게 그런 상처를 더 이상 주지 않을 때 용서도 사랑도 가능하겠지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급하게 답을 찾을 필요는 없어요. 선생님도 아프잖아요. 선생님이 시어머니를 감당할 수 있을 때 용서도 사랑도 가능할 거예요. 지금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네요. 선생님을 위해서도 선생님의 시어머니를 위해서도 기도할게요.”

“감사합니다, 수녀님.”

“선생님, 제가 선생님 좀 안아 드려도 될까요?”

나는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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