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쌈

화사하지만 담백한 그리움의 맛

by 올리가든

월남쌈을 먹게 된 건 우연이었다. 뉴캐슬대학교 근처에서 목회하던 목사님 댁에서였다. 우리는 호주에 도착한 처음 며칠간 음식다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날도 살 집을 구하느라 대학의 숙소 지원센터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었다. 동네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어 직원이 말하는 렌트 하우스가 학교에서 얼마큼 떨어진 곳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배고프고 피곤했다. 아침에 모텔에서 나와 샌드위치와 사과를 먹은 게 다였다. 긴장하고 스트레스받는 이 난감한 상황, 우리 뒤에서 미스터 킴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한국 사람 같았다. 그분도 우리를 보자 자기가 찾는 미스터 킴인 줄 알아봤는지 한국말을 했다. 교회 목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더니 집을 구했냐고 물었다.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더니 점심시간이니 우선 사택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일단 한국인 목사님이라는 것만 해도 얼마나 마음이 놓이던지. 나중에 보니 사택은 대학에서 가까웠다. 근데도 그날은 목사님 차를 타고 한참을 온 것처럼 느껴졌다.


시원하게 넓은 거실에는 음식상이 차려지고 있었다. 상위에는 금방 무쳐낸 배추 겉절이가 올라가 있었고 좀 있다가 노랑 초록 붉은색 채소들과 얇게 저민 소고기가 먹음직하게 담긴 큰 접시가 나왔다. 사모님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다가 나와서 어서 오라며 웃으셨다. 나는 초면이라 부엌에 들어가지 못하고 식탁에 음식과 수저를 놓았던 것 같다. 사람 수보다 음식이 많았다. 두 분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누군가 올 사람이 더 있었다. 곧 한국 남자 둘이 왔고 함께 음식을 먹게 되었다. 목사님과 잘 아는 사이인듯했고 그날 점심에 그분들을 초대한 거였다. 이민 와서 다른 도시에 사는 분들이었다.


우리 앞에 놓인 화려한 그 음식은 월남쌈이라고 했다. 아직 한국에 월남쌈이 유행하기 전이었다. 본 적 없는 음식이라고 우리에게 맛이 없겠는가. 일단 질리는 빵을 3일간 먹은 위장은 배추 겉절이만으로도 침이 넘어갈 정도였다. 목사님은 월남쌈이 처음인지 물어보더니 뜨거운 물에 라이스페이퍼를 담가서 이렇게 골고루 싸서 소스에 찍어 먹어보라고 알려 주셨다. 약간 미심쩍어 보이는 소스도 이상한 냄새가 나는 고수라는 것도 먹을만했다.


신선한 채소에 부들부들하게 삶은 쇠고기를 듬뿍 넣고 싸 먹는 이것이 내 입맛에 너무 잘 맞았다. 더구나 새로운 음식을 좋아하는 내게 그날 점심은 정말 멋진 식사였다. 그 월남쌈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 두 남자가 손님이었고, 우연히 그날에 맞춰 유학생으로 온 우리도 잘 차려진 한 끼를 먹게 된 것이었다.


그 후로 목사님 댁에 1주일을 신세 지면서 셋집을 구하러 다녔다. 목사님은 우리를 차에 태우고 세놓는다는 팻말이 붙은 학교 근처의 집들을 방문했다. 결국, 천장이 높아서 추웠지만 대체로 깨끗하고 마당에 작은 자카란다 나무가 자라던 집을 계약했다. 방과 거실, 부엌이 있고 마당이 넓은 그 집으로 우리 짐을 옮기면서 사택 신세를 면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몇 번은 베트남 음식점이 눈에 띄면 들어가 보았다. 그날의 월남쌈을 생각하며 주문해 보았지만 앞에 놓인 것은 내가 먹고 싶어 한 그게 아니었다.


그곳에 사는 동안 우리는 교회의 이런저런 도움도 받았다. 몇 개월 후 다른 도시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 목사님 부부는 우리를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차려 주셨다. 밤을 꼬박 새워 9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낯선 도시로 가던 그 밤, 축축한 이슬 내린 목장에 소들이 모여 서서 밤을 새우던 그곳, 나는 쓸쓸한 마음이 되어 사모님이 녹음해 준 찬양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다.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 밤에 듣던 CCM이 나오면 마음이 촉촉해진다.

그 후 전화도 몇 번 했고 성탄에는 목사님이 카드도 보내주셨다. 한국으로 돌아와 살면서도 가끔은 생각나고 그리웠지만 마음뿐이었다.


작년에, 아직 그곳에 계실까? 아니면 연세가 있으니 한국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겠다 싶어 연락처를 찾아보았다. 두 분 모시고 식사라도 하고 싶었다. 교회 홈페이지를 보니 선교지에 아직 목사님 이름이 있었다. 맞나 싶어 이메일을 보냈다. 아직도 거기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계셨다. 사모님도 안녕하신지 안부를 물었다. 사모님은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했다. 이메일을 읽던 내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물어보진 않았지만, 마음이 아팠다. 나는 이렇게 갚지도 못하는 신세를 지며 살았다.


그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사모님은 손에서 일을 놓을 시간이 없는 듯했다. 학생이든 교민이든 사택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 있었으니 쉴 수가 없었을 테다. 시험 보는 날은 따끈한 어묵탕을 끓여 학교로 가져오기도 했다. 외로운 유학생들에게 어머니 같은 분이었다. 나에게 월남쌈은 어디에도 없는 그리움의 맛이다.























keyword
이전 03화돼지고기 두루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