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손님들이 오기로 해서 찬거리를 사러 나갔다. 옆동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장터가 열리는 날이었다. 금요일마다 열리는 장터에는 과일과 반찬거리와 신선하고 푸릇한 채소가 가격까지 착했다.
겨울을 지나며 매운맛이 야문 대파 한 단, 통째로 먹으면 아삭아삭할 듯한 오이를 몇 개 사고 나서 도토리묵을 한 모 사려고 묵집에 갔다. 다른 날 같으면 묵 한모만 사고 나왔겠지만 오늘은 벌써부터 허기가 지고 힘이 들었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려면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묵채를 한 그릇 주문했다.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도록 투명 비닐이 쳐진 포장마차 안엔 내가 첫 손님인 모양이었다. 넓적한 스텐 대접에 넘칠 듯 담긴 묵채 한 사발을 받아 들었다. 고명으로 얹은 노란 달걀지단과 김가루, 초록 대파와 청양고추 다져 넣은 양념간장이 먹음직했다. 받아 든 대접을 식탁에 내려놓기도 전에 우선 국물을 마셔보았다. 뜨끈한고 매콤 짭조름한 게 입에 착 달라붙었다. 비스듬한 경사면에 놓인 야외용 플라스틱 식탁이 기울어있고, 나는 국물이 넘칠까 봐 조심하면서 가늘게 채친 묵채를 입에 넣었다. 도토리묵은 찰기가 없는 음식이어서 이런 때는 일회용 나무젓가락이 제격이었다. 환경을 생각한다 해도 이때만큼은 미안하지만 나무젓가락을 사양하기 어려웠다.
사실은 도토리묵 고유의 맛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본래의 묵 맛이 가진 쌉싸래하고 조금은 떫은맛을 기대했었다. 그래도 아쉬운 묵 맛을 국물이 대신해 주었다.
사람이 사람을 끄는 법인지 내가 먹기 시작하고 몇 명이 더 들어왔다. 테이블은 겨우 네 개, 주인아주머니가 같이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네. 되고 말고요." 내가 대답하니 칠십은 더 돼 보이는 할머님이 들어와 앉으며 통 밥맛이 없어서 묵이라도 먹어야겠다 했다. 그 말을 받아 몸집이 여유롭고 인상 좋은 사장님이 "저는 밥맛 좀 없어봤으면 좋겠어요. 아플 때도 밥맛은 좋아서 살이 안 빠져요." 라고 했다. "어이구. 그런 말 하믄 못써요. 안 그래도 늙으면 밥맛이 없어지는데..." 할머니가 손을 내 저었다.
입맛 좋을 때 많이 먹으라는 어른들의 말이 맞다. 내일이 오늘과 같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 아주머니 두엇이 더 들어왔다. 다들 각자 왔지만 한 공간에서 아는 사이인양 묵채를 먹었다. 먼저 들어온 내가 한 그릇을 다 먹고 일어났다. 배가 부르니 일할 기운도 생기고 마음도 느긋해졌다.
이런 곳에서는 모르는 사람들과 합석을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말을 붙여봐도 괜찮고 들리는 말만 들어도 좋았다. 묵채 한 그릇의 여유를 넉넉하게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