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와 삼겹살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탈

by 올리가든

치맥을 먹자는 말에 따라나섰다. 맥주를 즐기진 않지만 남편이 먹고 싶은 것 같아 저녁으로 한 끼 때우자 생각했다. 아직은 여름 끝자락인 9월의 여섯 시여서 저녁이라고 하기도 일렀다. 일요일이라 호숫가에 있는 치킨집은 가게 밖으로 내놓은 자리까지 손님으로 가득 찼다. 겨우 안에 한 자리가 있어서 앉으며 주문을 했다.


주문받은 직원이 다시 오더니 죄송하다고 연신 머리를 숙인다. 닭고기가 다 떨어졌다고 했다. 닭발과 닭똥집 요리만 가능하단다. 겉으로는 그럼 어떡하지 했지만 속으로는 삼겹살을 먹으면 되겠구나 싶었다.


가끔은 삼겹살이 당긴다. 삼겹살 2인분에 소주 한 병, 된장찌개까지 주문해 제대로 저녁을 먹었다. 두 사람 다 만족도 100이었다. 반찬으로 나온 매실 피클이 아삭 달콤해서 무척이나 입맛을 돋웠다. 매실의 힘인지 소주 두 잔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병에 한잔 정도를 남겨 놓고 나왔다.

나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잘 마시지도 못한다. 20대에는 사람이 가득한 맥줏집 분위기가 좋아서 가끔 다녔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500cc 한잔 정도면 족하다. 배부른 맥주보단 뜨겁고 쏘는 듯한 소주가 그나마 낫다.

보통은 한 잔, 기분 좋은 날은 두세 잔이었다. 쉽게 어지럽지만 그만큼 빨리 깼다. 술이 들어가 핑그르르 도는 상태는 잠깐이었다. 그래도 술이란 건 참 묘했다. 마시면 웃음이 났다. 기분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자꾸만 웃음이 났다.

90년대 어느 연말이었다. 편한 저녁을 먹자고 음모를 꾸민 적이 있다. 우리 사무실에는 여직원이 넷이었다. 은밀하게 약속을 잡았다. 기혼자들은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야 했다. 언니 둘은 워킹맘, 나는 기혼이지만 아이 낳기 전, 막내는 미혼이었다. 여자들끼리만 갔으니 평소에 밥 먹으러 다니던 잘 아는 집으로 갔다. 그날만큼은 우리끼리만 가자고, 술도 한 잔씩 하자고 했다. 안팎으로 일을 짊어지고 사는 여성들에게 숨 쉴 틈이 필요했을 터였다.

소주는 쓰다고 싫어한 나를 위해 사무실 근처 마트에서 캡틴큐를 사 갔다. 캡틴큐는 럼주 계열의 국산 양주로 가격도 비싸지 않았고 맛없는 소주보단 나았다. 그들이 소주를 먹을 때 나는 양주를 먹은 셈이었다. 꽤 독했던지 금방 얼굴이 뜨거워지고 웃음이 실실 터져 나왔다.

동료들은 내가 술자리를 즐겨서 기분이 좋아지는 걸로 알았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방에 우리만 있었기에 망정이지 술주정이 될 뻔했다. 웃는 나를 보고 나머지 셋도 웃고. 과한 술이 우리를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독한 것인 줄도 모르고 주량도 모르고 마셔댄 캡틴큐.

적정한 수위를 넘어선 알코올은 나에게 웃음 제조기였다. 그 후로 소주 세 잔을 넘지 않으려 했다. 웃음이 무서워서였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전철에서도 웃음이 나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기도 했다. 술 때문에 곤란을 겪은 것은 그 정도였다.


별다른 애주가도 아니면서 삼겹살에 소주가 그리운 날이 있다. 직장을 나오니 그럴 기회가 없다. 새로 사귄 여성들 모임은 대개 얌전한 전업주부들이라 점심식사 정도로 만족한다. 술 같은 거 없이도 잘 지내니 좋은 모임이다.


남편 친구 부부 모임도 허물은 없지만 나이 먹었다고 건강 챙긴다고 삼겹살을 같이 먹은 기억이 없다. 오리고기는 먹으면서 삼겹살은 안된다니 말도 안 된다.
내 고등학교 친구는 술을 조금도 못한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숨이 안 쉬어진다나 뭐라나. 이 친구가 삼겹살은 고지혈증이라 못 먹고 오리나 생선만 먹는다. 막역한 사이라고 잔소리를 한다. 운동을 해서 아무거나 좀 먹을 수 있게 하라고. 좀 웃기는 얘기다. 남이야 뭘 먹든지 안 먹든지 내가 뭐랄 수 있는 건 아닌데 말이다.


이 글을 보고 내가 술을 잘 먹거나 고기를 잘 먹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고기는 1인분, 술은 두 세잔이 맥시멈. 그나마 연중 두세 번이다. 먹고 편한 자리일 때 그렇다. 소주 한잔 먹는 게 내겐 작은 일탈인 셈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좋았던 것 중 하나가 회식에 안 가도 되는 거였다. 맨 아래 직원부터 맨 위 사람까지 함께하는 회식은 고역이었다. 직장이니까 적당히 회식에 어울려 다녔다. 그래도 큰 권력 없는 사람들끼리 소소하게 술 한잔하던 시간은 생각난다. 대책 없이 웃음이 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2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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