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동창이 50이 넘어 이름을 바꿨다.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이름을 영선이로 바꾸었으니 그리 불러달라고. 새삼스럽고 어색해서 둘이 한참 웃었다. 전화번호 ( )안에 예전 이름을 나란히 적어놓았다. 정든 이름을 혹시 잊을까봐 아쉬워서.
통화를 할 때 새 이름을 불러줘야 하는데, 미안하게도 자꾸 예전 이름이 튀어나온다. 우리가 아는 그아이는 예전의 이름을 가진 친구였기에 그럴 것이다.
나이가 먹어 이름을 바꾸는 것은 참 헛갈리는 일이다.
우리집 남자형제들은 돌림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지만 자매들 이름은 공통점이 없이 서로 다르다. 언젠가 엄마한테 물어보니 나와 바로 위 언니는 예쁜이름 같아서 엄마가 지었고 셋째 언니는 아버지가 지으셨단다. 셋째 언니는 두 글자 모두 한자의 좋은 뜻만 따다 지었다. 본인은 이름이 싫어서 개명하고 싶어 했다. 아버지의 진심을 알면서도 이름은 의미만큼이나 부르기도 좋은 것이이어야 하기에 그랬던 것 같다.
이름이란 게 살아평생 사용하고 죽어서도 남으니 그렇다.
우리도 아들 이름을 지을 때 고민했다. 시아버님은 성경에 나오는 한 단어를 이름으로 지으려고 내심 생각중이셨던 것 같다. 들어보니 ‘안존(安存)’ 이라는 이름을 염두해 두셨다고 하신다. 귀한 손자가 편안하게 살라는 뜻이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그런 뜻을 생각해도 자식에게 불러주기에는 정말 미안할 것 같았다. 아들 이름은 우리가 생각해 놓은게 있으니 양보하시라고 설득했다.
몇 일 고민끝에 이름을 지어 출생신고를 하러갔다. 담당직원은 아이 성씨의 본관을 한자로 써 달라고 했다. 그 흔한 김씨 중에 하필 쓰기 어려운 한자, 연기김씨란 말인가. 많이 쓰는 본관들은 구비해 놓은 견본에 나와있었지만 내가 찾는 본관은 거기에 없었다.
연기라는 글자가 나에게 참 어려운 한자였다. 담당자도 도와 줄 수 없는 일이니 맥 빠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전 서류에 적힌 것을 보고 다시 작성해서 그 다음날 가져갔다. 출산 후 몸이 아직 가뿐해지지 않아 아기를 안고 다니는 것도 벅찼던 나로서는 출생신고를 힘들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이야 인터넷 검색만 해도 바로 나오는 것이고 가족관련 서류를 떼어봐도 알 수 있는데 그때는 전산화가 되지 않았던 때였다.
아들도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본인이 만족하니 다행이다.
출생신고를 마치고 주민등록등본을 발급 받았다. 두 사람만 있던 등본에 아기라고만 부르던 자식이름이 한 줄 더 들어가 있었다. 이제 세상에서 한사람으로서 몫을 부여받은 듯했다.
아직 옹알이도 못하는 한달이 채 안된 아기에게 등본을 펼쳐보이며 말했다. "아가야, 너 여기있네.
이제 너도 한 사람이라고!"
이름이 문서화되는 것에 왜 그리 큰 의미를 두었는지는 모르겠다. 울컥한 마음이 들어 코끝이 찡했다. 전에 없던 특별한 느낌, 아이에 대한 뿌듯함 같은 것이었다. 갑작스런 감정이었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이겨내며 살아야 할,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막연한 안쓰러움도 있었던 것 같다.
아기에게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사회에 소속되는 공식적인 첫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이름을 가지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한다. 누구의 자식으로, 어느곳의 구성원으로, 한 개인으로서 그 이름이 당당하기를 바란다. 이름의 주인이 자부심 갖는 이름, 거기에다 다른 사람이 불러주기도 좋은 이름이면 금상첨화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