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ng ho Lee Jun 02. 2024

11. 병원에서 밤을 새우다


이번 글에서는 아이의 병원 방문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돌 이전에는 병원에 가는 경우는 출산 이후 정기 검진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돌 이후에 병원에 빈번히 가게 되었다. 이른바 돌치레라고 불리는 기간으로 아이가 면역이 약해서 병원균이나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잔병치레를 하는 기간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간은 만 3년까지 지속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간의 초입에 들어가 있는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아이의 아버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부쩍 늘어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아이의 성장세가 가파른 시점에 육아휴직을 한 나로서는 아이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어떤 것을 신경 써야 할지 좀 더 책임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부분이 건강이었다. 이전에는 나는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거나 코 막힌 소리가 나더라도도 인식하지 못했다. 아내가 이러한 아이의 증상을 빠르게 알아차리고서는 나에게 병원에 다녀오라고 말하였지만 여전히 나는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다. 어린이집 입소 이후 시작된 아이의 감기, 노로바이러스 등 돌치레를 거고 나서야 나는 아이의 건강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의 열에 대해서 직접 재보거나 소화가 잘 되지 않는지 보다 열심히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삐뽀삐뽀 119를 비롯하여 다양한 책이나 콘텐츠를 탐색하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해당 정보를 기반으로 필요한 액션아이템이 있다면 아내와 함께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우리 가족의 시간은  평화로운 시간이었고 이런 지식이 쓰일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없도록 하기 위해서 열심히 지냈다. 하지만 문제는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그게 하필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은 주말 이후에 병원에 갈 수 있다 보니 항상 신경 쓰이는데 말이다.


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저녁 8시부터 말이다. 아이를 안았는데 뭔가 열이 느껴졌다. 그래서 열을 재보니 37.5도를 넘어서 37.8도 정도가 지속되고 있었다. 아내에게 더블체크를 요청하였다. 확실히 열이 나고 있었다. 어딘가 아이가 아픈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점에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이는 항상 건강해서 하루 만에 노로바이러스도 감기도 나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와 아내가 일주일이 넘도록 아팠기에 우리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서 없었기에 지난번 아팠을 때처럼 나는 아내에게 불침번을 제안하였다.


열은 밤에 더 오르기 때문이다. 누워있는 자세는 머리가 평소보다 낮게 유지되다 보니 코 안쪽에 콧물, 가래 배출이 원활하지 않게 되어 염증이 생길 수도 있고, 몸이 저녁에는 휴식할 준비를 하고 본격적으로 바이러스와 싸우기 시작하면서 더 열이 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때 아이가 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아이가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부모가 돌아가면서 건강을 체크해 줄 수밖에 없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병균에 맞서 싸워나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불침번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특히 지금처럼 어릴 때는 더더욱 필요했다.


아내는 일을 하고 왔기 때문에 피곤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먼저 내가 새벽 3시까지 밤을 새기로 하였다. 아내는 자고 일어나 그 이후에 아이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였다.


아이에게 밥을 잘 먹이고 일찍 침대에 아이를 재웠다. 코감기 증상을 보이면서 코가 막히는 듯한지라, 어차피 자다가 여러 번 깰 것을 감안하면 일찍 자도 충분한 시간의 수면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는 코가 막혀서 킁킁거리면서 역시나 잘 자지 못하였고 결국 내가 안아서 재웠다. 아이러니컬하게 이때가 가장 애정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측은지심이 이런 것인지, 평상시에 밥을 안 먹으면 그렇게 미웠는데 지금은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마음속에 가득하였다.


그렇게 잠이 들은 아이에게 다가가 한 시간마다 온도를 재기 시작하였다. 혹시 잠이 깰까 봐 아내가 이마를 짚어보고 온도를 재라고 했는데, 나는 이마를 짚고 판단이 어려워서 조심스럽게 겨드랑이 온도계를 사용해서 온도를 쟀던 것 같다. 그렇게 새벽 1시까지는 열이 더 이상 오르지 않는 듯하였다.


다행이었다. 이제 2시간만 더 버티고 아내를 꼬우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책도 읽고 게임도 켜서 하였다. 그래도 잠이 올 경우를 대비해서 차가운 물을 놓고 마시면서 버텼다. 삼십 대 중후반에 들어가니 새벽에 밤을 새우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정말 나를 위해서도 새벽까지 밤을 새운 경우는 이제 거의 없는데 아이를 위해 열심히 버텼다.


드디어 2시가 넘어가서 다시 아이의 열을 재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아이의 방에 조심스럽게 들어가는데 이번에는 좀 느낌이 싸하였다. 아이의 호흡이 굉장히 거칠고 평소보다 빠른 느낌이었다. 온도계를 쓸 생각도 못하고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댔는데 뜨거웠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머릿속 한편으로는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해야 해, 넌 아빠잖아”라는 생각이 공존하고 있었다. 명확한 것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른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내를 깨웠다.


깊이 숙면에 들어가 있던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내 이야기를 듣고서 놀란 아내는 빠르게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머리에 손을 대본 아내는 나에게 바로 해열제를 꺼내서 갖다 달라고 방문 너머 서 있던 나에게 말하였다. 굉장히 급박한 말투였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군더더기 없이 해열제를 양만큼 채워서 아내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때쯤 정신이 안정된 나는 아이의 열을 재보았다. 열이 무려 39.5도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때 시간이 새벽 2시 40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내는 해열제를 먹었으니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기다릴 수 없었다. 39.5도라니 마의 40도 지근거리에 있는데 나는 이 열을 당장 내려야만 했다.


그래서 조금 기다리자라는 아내의 말을 자르고 응급실을 알아보자고 하였다. 집에서 세브란스병원이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우선 다녀오자고 하였다. 이런 모습이 과거에도 한 번 있었다. 바로 2022년, 아내와 내가 모두 Covid-19에 걸렸을 때였다. 이때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하루 먼저 걸렸던 나도 환자이지만 나보다 더 아픈 아내를 간호하는 상황이었다. 그때도 끝내 병원에 안 가고 버티겠다는 아내의 의지를 끝끝내 꺾고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에 갔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덜 아픈 환자라는 이유로 새벽 2시까지 바깥에서 덜덜 떨다가 아내와 함께 귀가하였다.


결국 이번에도 내가 우겨서 우리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세브란스 응급실로 직행하였다. 보호자는 한 명만 동반 가능했기에 내가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로 뛰어들어갔다. 새벽의 피곤함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때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실행 자체는 정말 빠르게 하는 스타일이었던 나이기에 응급실 내부까지 정말 빠르게 진입해서 침착하게 아이의 증상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돌이켜보니 나는 큰일이 생겼을 때 오히려 더 마음이 침착해지는지라, 필요한 내용만 정리해서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던 거 같다.


들어가 보니 우리 아이 말고도 몇몇 아이들이 이미 대기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띄어있는 현황판을 보니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다행히 아내가 기저귀나 물 등을 미리 다 챙겨서 가방에 넣어준 탓에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작은 담요도 가지고 왔지만 아이가 열이 나는 상황에서 굳이 열을 높일 필요는 없어서 사용하지 않았다.


몸무게가 12Kg가 넘는 아이였지만 이 때는 그냥 그런 무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계속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도 내 품에서 떨어지길 싫어하였다. 그렇게 이십여분을 안고 있었다. 문득 지난 2년 전 입원했던 병동이 기억났다. 그때 나는 갑상샘암 수술을 하고 회복 중이었다.


그때, 연말이고 병동에 자리가 여의치 않아서 소아병동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마침 크리스마스이기도 해서 벽한 켠에 트리를 만들고 아이들이 소원을 적어놓은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그리고 아이의 부모님이 적은 편지를 보고 가슴 아팠던 기억이 있다. “집에 가고 싶어요”나 “놀이공원에 가보고 싶어요” 등 굉장히 본질적이면서도 소박한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기억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니, 이 대기실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졌다. 개개인으로서 보다 더 많은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을 위해 빨리 회복될 수 있길 말이다.


여하튼 그렇게 수십여분이 지나고 나서야, 아이는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새벽 4시가 가까워지는 시점이었는데 의사 선생님은 정말 아이를 위해 웃어주시면서 진찰을 해주셨다. 아이는 의사 선생님을 보자마자 자지러지게 울었는데 울음이 어느 정도 잦아들 때까지 아이를 위해 놀아주시고 여러 가지 검진을 진행해 주셨다.


예상은 하였지만 감기였다. 그리고 귀도 살짝 부어서 중이염으로 갈 수 있으니 지켜봐야 한다는 말씀도 주셨다. 말로만 듣던 중이염 이야기를 하시니 부모로서는 순간 약간 심각해졌다. 이내 내 표정을 보셨는지 선생님은 이 정도로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고 가능성이 있다 정도이니 너무 걱정 말라고 안심시켜 주셨다.


검진이 끝난 후, 선생님은 처방전을 작성해 주셨고, 응급실에 오기 전 먹은 해열제의 효과가 곧 나타날 테니 좀 더 병원에 머무르다 갈 것을 권하셨다. 그래서 대기실로 가서 머무르려고 했는데, 아이도 이제는 대기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지 다시금 크게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 떼는 복식호흡으로 운다고는 하지만, 이게 새벽의 고요한 응급실과 맞물리니 참 견디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응급실 입구에 아이를 안고 다시 삼십여분 가까이를 서서 기다렸다. 이후 아이의 열을 다시 재보았고 다행히도 열이 정상범위로 내려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집으로 가기 전에 처방전을 받아 약을 결제하는데 깜짝 놀랐다. 굉장히 많은 비용이 나온 것이다. 응급실이기에 이해는 하였지만, 평소에 다니는 소아과와 비교한다면 큰 금액이었다. 그래도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아이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응급실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되니 약 5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프로젝트나 게임을 하다 밤을 새운 것도 벌써 아주 오래전 기억인데, 다른 일 때문에 이렇게 밤을 새울 줄이야… 하지만 워낙 예민해져서였는지 집에 올 때까지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집에 와서 아이가 잠을 자는 것을 보니, 그때서야 잠이 미친 듯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정신력이 체력을 압도하던 시간이 끝난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는 이후에 이 주 정도 콧물과 미열로 잔병치레를 좀 더 하다가 다시금 원래 모습처럼 건강하게 돌아왔다. 물론 그 사이 나도 아이로부터 감기를 옮아서 2주 가까이 고생을 했던 것 같다.


아이가 어린이집 간 사이 내 감기약을 사러 약국을 갔는데 약사가 나에게 감기는 언제 걸렸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그래서 아이가 걸려서 옮았다고 답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약사는 웃더니 아이의 개월수를 물어보면서 나에게 말하였다.


“엄마 아빠가 건강해야 아이도 건강해요”


그리 자주 가는 약국도 아니었는데, 이런 말이 그리웠는지 순간 굉장히 위로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집에서는 아이가 1순위이고 나는 저기 어딘가 우주 끌로 밀려나 아이를 위해 사는 사람처럼 살아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온전히 나 개인을 위한 이야기를 들었던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아이가 아프면 약을 먹이고, 동네 병원을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큰 병원까지 다녀왔다. 점점 다양한 상황에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아이를 낳기 전, 아이를 낳으면 무언가 더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 성장하고 있는 느낌이다. 여러 의미로 말이다. 하지만 부디 좋은 경험만 많이 쌓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우리 모두 건강해야겠다. 아내에게도 운동을 (강) 권해야겠다.


이전 10화 10. 이제 잘 시간이야(제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