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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g ho Lee Jun 23. 2024

14. 자녀라는 거울과 성장

이전에 나는 아내가 왜 나와 결혼하였는지 불현듯 궁금해져서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아내는 내가 큰일이 벌어졌을 때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습에 신뢰를 느꼈다고 결심했다고 답하였다. 실제로 나는 상대적으로 큰 일은 이미 통제 가능한 순간을 벗어난 상황이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충분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 않는다. 이는 민첩하지 않은 나의 성격을 고민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나는 결정을 하고 움직이기까지,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빠르지는 않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질문을 누군가로부터 받으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래서 많은 상황을 가급적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는 모습으로 이런 상황을 타개하곤 하였다.


하지만 모든 일을 대응할 수는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몇 년 전부터는 아침 명상을 통해서 마음을 잡아주고 정리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아내보다 일찍 일어나거나, 때로는 출근길에 마음 챙김 명상을 함으로써 마음을 미리 정갈하게 준비하여 비워놓는 것이다. 아침 명상과 계획은 이렇게 나의 삶을 지탱하는 주요 기술 중 하나였다. 아내도 이 시간은 가급적 지켜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아이는 아직 이런 부분을 고려하기에는 아주 어려웠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아이는 나의 모든 계획하고 예상한 선을 가볍게 넘어오면서 태어났다. 아내의 생일 다음날, 갑작스럽게 태어남을 알린 아이는 18시간의 진통 끝에 결국 제왕절개로 태어났다. 아내와 함께 진통을 하는 상황에서 정말 오랜만에 밤을 꼬박 새웠다. 보호자를 위한 시설이 없어서 쉬지도 못했지만, 분만 시 배운 호흡법을 아내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던지라 함께 하였다.


그렇게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에 대해서, 혹여나 제왕절개를 어른들이 좋게 생각 안 하실까 봐 그 정신없는 순간에서도 제왕절개에 대한 자료들을 읽어가며 제왕절개가 최선의 방법이고 자연분만과 크게 차이 없음을 숨 가쁘게 공부하느라, 아이가 태어나 신생아실로 간 순간에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보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첫 순간부터 아이는 나에게 엄청난 순발력을 요구하며, 내가 그간 지켜온 나의 선에 대해서 가볍게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면서 아이를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는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파도처럼 배워야 할 것, 그리고 배운 것을 적용해야 하는 것들이 내려올 줄은 몰랐다.


혹자는 진짜 어른이 되는 순가이라고 했지만, 순발력이라는 기본기가 약한 내가 우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었다. 되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기본 사실로 두고 내 삶을 투자해야 했다.


아이와 집에서 자는 첫날밤, 나는 왜 어른들이 뱃속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한 순간이었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지 바로 이해가 되어버렸다. 아이는 지금 내 모습이 축소된 작은 어른이 아니었다. 이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나와 아내를 디딤돌 삼아 새롭게 성장하는 또 다른 인간이었다.


한번 깨서 잠이 들기까지 3시간의 반복된 생활패턴이 계속 반복되었다. 3시간 내에는 밥도 먹이고 잠도 재우는 모든 활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충분한 수면시간과 충분한 식사가 아주 잘 보장되어야 했다. 즉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시간이 되면 잘 자야 했다. 이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야 했다.


말도 안 통하고, 왜 우는지 모르는 아이를 놓고 재우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특히 나는 새벽 시간 육아를 담당해서 그런지 더욱 쉽지 않았다. 이전에 일하던 상사분의 조언에 따라 아내에게 충분한 수면을 제공하면 이후에 삶이 편해진다고 하여 새벽에 육아를 하고 출근하기로 아내와 협의하였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생후 백일쯤 되니 이런 상황은 아이의 수면시간이 길어지면서 나아졌다. 하지만 이때 나의 정신은 이미 꽤 마비가 된 상황이었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화가 너무나도 필요하였다. 항상 계획에 의존해서 살던 나에게 아이는 어떠한 것도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예외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피하면 아내에게로 피로가 전가될 것이고, 그 피로감은 다시 나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감당하는 게 맞았다. 그래도 아이는 3시간마다 자야 하는 패턴을 완벽하게 지켜냈기 때문에 해결책은 있었다.


이에 맞춰서 일어나서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는 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 챙김을 통해서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 아이를 대하면 아이가 비로소 내 아이로 보였다. 다음에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하나씩 실험하는 마음으로 대하니 아이에 대한 마음속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이를 재울 때 동요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해도 목청이 좋았던 나는 학교 다닐 때 가곡이나 동요를 부르는 것을 즐겼다. “엄마야 누나야”라든가 “선구자”와 같은 노래를 아이에게 조용히 불러주면서 아이를 흔들어주었다. 가만히 서서 재우는 것도, 의미 없이 흔들며 재우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렇게 하면 나도 재우는 게 편했다.


아이는 다행히 내 기대에 부응하며 잘 잤다. 그러했다. 삶에서 모든 문제는 조금씩 부딪히면 그래도 쉬어지는 것 같았다. “Everything is difficult before it becomes easy(모든 일은 쉬어지기 전에는 어려운 법이다)”라는 격언이 마음에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렇게 내 삶에서 지경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잠을 잘 자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난관이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아이의 두 발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우량아이면서 사내였다. 바깥을 너무나도 좋아했다.


우리 부부는 바닥에 물건을 모두 치우고 방 곳곳에 아이가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두는 편이었다. 덕분에 아내가 수집하는 만화책도 모두 난장판이 되기는 하였지만 아이가 많이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의 체력에 비해서는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하원을 한 이후에 가볍게 간식을 먹은 이후에는 아파트 한 바퀴를 아이와 함께 걷곤 했다. 처음에는 반바퀴만 돌아도 충분하였던 것 같다. 아이는 반바퀴 돌면 집에 들어와 바로 간식을 열심히 먹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몇 주는 조용히 지나갔다. 그런데 이제 아이가 뒤꿈치를 들기 시작하였다. 발목에 힘이 생기는 것으로 보였다. 까치발을 세우고 식탁의 물건을 건드리기 시작하였다. 정말 성장의 신비함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아이는 이제 아파트 단지 반바퀴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 바퀴는 돌아야 했다. 한 바퀴를 도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여기에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동작도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동작이 추가가 되니 아이는 정말 잘 다치기 시작하였다. 한시라도 눈을 떼서는 안 되었다. 눈을 떼는 순간 정말 바로 다쳤다. 정말 갑자기 아이는 쿵하고 넘어지고 울었다. 그리고 상처가 생겼다.


게다가 아이가 내 손을 잡고 걷고 내려가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붙잡아주지 않으면 나에게 다가와 손을 붙잡고 가자고 하였다. 자연스레 허리를 숙이거나 쪼그려 아이를 도와주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이 동작을 하게 되니 허리가 욱신거렸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동작을 회피하였는데 자꾸 조르는 아이를 보니 도저히 회피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아이가 생기기 전 요통을 여러 차례 경험한 나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운동을 더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흘에 하루는 운동을 하자는 기치 아래 자전거와 검도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니 운동은 운동대로 재미있어지고 아이와 노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물론 비가 오거나 아주 더울 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난제이다. 아이는 날씨와 상관없이 나가자고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겨울이 와도 고민이다. 아이가 이러한 날씨를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될 텐데 어떻게 경험해 주는 게 가장 최선일지는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나의 거울 같은 아이를 보면 나도 성장하는 것 같다.


이외에도 아이는 정말 많은 순간에서 좋은 의미에서 보면 도제식으로 나를 성장시켰다. 아이가 선을 넘기도 하고, 내가 나의 선에 대한 지경을 더 넓히기도 하고 정말 각축전이 따로 없었다. 이전 화에서 잠깐 썼지만 밥을 먹는 시간도 그러한 관점에서는 굉장히 매 순간 치열했던 기억이 가득하다.


비싼 이유식을 재미 삼아 엎어버리거나 던지거나 하면서 웃는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아이가 아닌 어른이었다면 절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보지 못할 광경일지도 모른다. 아니, 보면 그 자체로 세간에 화제가 될만한 뉴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매 순간 보고 매 순간 참거나 이겨내야 하는 그런 경험들, 정말 내 아이가 아니면 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때마다 정말 마음이 힘들었다. 나는 아이를 관찰하는 사람도 아니고 아빠이기 전에 한 명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린 마음을 감추기 위해 탄탄한 계획과 이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한 명의 사람일 뿐이었다.


이 때 내 이야기를 듣던 대학교 후배가 “부모역할 이론”이라는 책을 추천하였다. 이 책의 저자는 처음 부모가 된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부모로 자녀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것을 권하고 이에 대한 방법론, Parent Effectiveness Training(P.E.T.)를 소개한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아버지는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갔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여쭤보았다.


나의 아버지는 IMF를 정면으로 맞닥뜨린 세대였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와서 나를 보면서 부모로서의 마음을 다잡았다고 하셨다. 가정은 반드시 지킨다라는 강한 의지가 마음속에 느껴졌고, 그 이후로 아버지는 그 의지에 삶을 묶고 살아오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 이야기를 두 번째 듣지만, 부모가 되어 다시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첫 번째 들었을 때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아버지와 신념의 문제로 아침에 크게 다투고 난 직후였다. 아버지의 신념을 무시하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받아들이신 것 같아 저녁에 아버지와 단둘이 앉아 말씀드렸다. 어떠한 상황에도 아버지의 희생과 신념을 존중하기에, 이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속에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시며 나의 결정이 아버지를 흔든 것 같아 힘들었다고 말씀 주셨다. 그 말이 나의 선을 넘나드는 아이를 보면서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지금 거울과 같은 나의 아이를 보고 있었다.


한 가지 차이는 있었다. 아이는 항상 어른을 용서한다는 말처럼 아이는 잠깐 나의 화난 얼굴에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가도 금세 나에게 뛰어와 안기고 있었다. 내가 오히려 참 많이 어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잘하면 되는구나 라는 반성과 함께 말이다.


나의 아이의 이름에는 많은 사람을 위한 나무가 되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게 이름을 지을 때는 성숙한 듯이 이름을 정했는데 막상 이렇게 내가 부모로서 먼저 삶에서 실천하려니 어렵다. 아이가 이렇게 도와주는데 말이다. 이런 마음 잊지 않고 아이에게 물려주면 좋겠다. 어깨 위에 멀리 바라보는 사람으로 넓은 지혜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오늘도 욱할 때가 있다면 꾹 잘 삼키고 아이와 지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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