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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pr 21. 2022

여우랑 줄넘기, 모든 곳의 신


친구의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 정의야 여러 갈래겠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선 ‘조건 없음’이 우선될 것이다. 여행지의 익명성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초면의 타인에게 스스럼없이 비밀을 말하는 것도 어쩌면 그토록 순진한 조건 없음이 조성되기 힘든 현실 때문일 것이다. 

모든 관계가 심연과 바닥을 나눌 필요 없다. 한결같은 예의바름과 약간의 다정함에서 시작하는 편이 좋다.


현업에서 활동 중인 사카이 고마코는 다작만큼 높은 팬덤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운영하던 공부방에서 많은 그림책들을 접하며 일찍부터 그림책 작가를 꿈꿨다고 한다. 특히 일본의 대표 아동문학가 사노 요코 佐野洋子와 고미 타로 五味太郞가 화풍과 서사 모두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사카이 고마코는 ‘어린이들의 순간’에 대한 탁월한 묘사로 사랑받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션에서 미세함을 포착해낸다. 다소 거친 크로키 같은 데생은 허투르게 쓰인 선이 하나도 없다. 짧은 기간이지만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그 자신의 경험에서 기인하는 연극적 여백도 즐겨 활용한다. 무엇보다 삶의 고요한 순간들을 응시하는 통찰이 존재한다. 

발랄하게 사랑스러운 <노란 풍선 ロンパ-ちゃんとふうせん>, <나와 엄마 ぼく おかあさんのこと…>, 성찰과 위로의 애수 어린 이야기 <벨벳 토끼 ビロードのうさぎ>, <곰과 살쾡이 くまとやまねこ>, 최근 들어 점점 확장되는 고요하면서 소슬한 분위기의 <빨간 양초와 인어 赤い蝋燭と人魚>, <BとIとRとD> 등 인장 같은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연출을 부단히 시도하고 있다.

#벨벳 토끼, 백일몽 https://brunch.co.kr/@flatb201/255

<엄마와 나 ぼく おかあさんのこと…>
<벨벳 토끼 ビロードのうさぎ>
<여우의 신 きつねのかみさま>
<한나가 눈을 뜨면 はんなちゃんがめをさましたら>
<상자 열림, 상자 닫힘 ボックスが開いている、ボックスが閉じている>
<빨간 양초와 인어 赤い蝋燭と人魚>
영화 <까마귀 기르기 Cría Cuervos>의 주연 Ana Torrent 이미지 컷, 미소녀로 인기 높다 (@asahi-mullion.com)


사카이 고마코 자신의 오리지널 스토리뿐 아니라 좋은 이야기를 가진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이미지 언어를 만든 작품들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중 <여우의 신 きつねのかみさま/국내 정식 번역판: 여우랑 줄넘기>은 노래를 형태로 만든 것 같은 작품이다. 아주 쉬운데 질리지 않는, 누구나 사랑해마지 않는 그런 노래다. 사카이 코마코 특유의 사랑스러운 모션과 눈이 아린 초록이 물씬하다.

줄넘기를 찾으러 간 어린 남매가 아기 여우들과 마주친다. 

..여기까지만 읽고도 벌써 웃음이 나지 않나?




간식을 다 먹고 나자 생각났다. 줄넘기를 공원 나무에 걸어두고 왔다는 것이.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따라나선 동생과 ‘나’는 공원으로 향한다. 그런데 줄넘기가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는 순간 시원한 바람이 즐거운 웃음소리를 실어 나른다.


“여우야, 여우야, 줄을 넘어라. 여우야, 여우야, 뒤를 돌아라.” 


노랫소리를 따라간 곳에는 아기 여우들이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아기 여우들은 즐거워 어쩔 줄 몰라했지만 매번 북실북실한 꼬리에 걸려 넘어진다.

숨어서 지켜보던 동생과 나는 기어이 웃음을 터뜨려 아기 여우들에게 발견된다.

동그란 눈을 실처럼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아기 여우들이 말한다.


“안녕, 우리 같이 줄넘기 할래?”


우리는 여우와 신나게 줄넘기를 한다. 이제 아기 여우들은 줄넘기 선수다!

앗, 그런데 이 줄넘기는…




여우들과 부르는 줄넘기 노래는 우리도 저절로 따라 부를 수 있는 익숙한 리듬이다. 줄넘기의 행방은 예측 가능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짜 반전은 그다음에 있다. 나는 이 책을 구판으로 가지고 있는데 제목과 화법이 다르다. 둘 다 마음에 들지만 구판의 제목이 약간의 스포가 될 수 있어 개정판 정보만 표기해 둔다.


어린 시절의 나는 ‘깍두기’라는 역할로 매번 구원받았다. 저주받은 운동신경에도 함께 뛰어 논 오후의 기억이 빼곡하다. 이 오후가 지나면 다시 볼일 없는 우연한 친분에도 어린이들은 최선을 다해 몰두한다. 따돌림 같은 함정에 빠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하찮은 용기와 화해로 서로를 지지해준다. 

목적 없이도 함께 노는 법을 잊어버린 이들이 다정한 배려를 간직할 리 없다.

피부색에 따라 환영이 달라지는 것은 어른들뿐이다. 그런 어른들은 비겁하기까지 해서 어린이를 핑계로 내세운다. 하지만 진짜 어린이들, 현실의 어린이들 대부분은 누구나와 친구가 된다. 이름이 쓰인 종이봉투를 끌어안고 긴장한, 전쟁터를 피해 온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의 친구들을 기꺼이 환영한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321071900057)


온갖 것을 신으로 떠받드는 일본은 실종에 관한 전설과 민간 신앙이 다수 존재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의 모티브가 된 것처럼 모호한 실종을 ‘신이 숨기다 神隠し’ ‘신이 업어갔다’라고 표현한다. 전통적인 여우의 신은 재물과 재앙을 동시에 주지만 아기 여우들은 신이 아니다. <여우와 줄넘기>의 어린이들은 무사히 돌아온다. 뜻하지 않게 나눠 받은 즐거운 시간에 대한 보답으로 다정함을 남겨둔 채.

어린이들은 줄넘기 하나로도 즐겁다. 그 즐거움을 민들레 홀씨처럼 퍼뜨릴 줄도 안다. 우리도 어린 시절에는 알고 있던 비법이다.

이타심, 그 안에 진짜 신 神이 있다.





@출처/ 

여우의 신, 아만 기미코 きつねのかみさま, あまんきみこ, 2004, 일러스트 사카이 고마코 酒井駒子

여우와 줄넘기 (북뱅크, 2018, 번역 김숙, 일러스트 사카이 고마코 酒井駒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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