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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y 11. 2022

돼지치기, 빈티지 일러스트


7층 높이의 매트리스, 황금으로 된 물레와 사과와 머리빗, 하늘을 나는 가방 등등 인기 있는 고전 동화들은 시그니처 이미지를 가진다. 안데르센의 동화 <돼지치기>는 ‘꽃송이 같은 드레스 가림막’으로 기억된다. 문장만으로도 이미 화사한 설정에 짧은 분량에도 판본마다 삽화가 곁들여지는 이야기 중 하나다. 하지만 어떤 비주얼로도 이 작품 아래 흐르는 음침함을 가리지 못한다. 오히려 화사한 이미지들로 인해 음험한 의도를 더욱 곱씹게 되는 작품이다. 그간 중복 소개해온 창작자는 이전 글로 대신한다.

#돼지치기, 공모자들 https://brunch.co.kr/@flatb201/197

#돼지치기, 빈티지 일러스트 https://brunch.co.kr/@flatb201/302

Dorothee Duntze, 2004




하인리히 레플러 Heinrich Lefler

명칭만 다를 뿐 어느 세대, 어느 분야든 새로운 물결, 새로운 세대가 교차했다. 20세기 초에 창단된 오스트리아 창작자 협회 하겐분트 Hagenbund 또한 그런 뉴에이지 반동의 일부였다. 창립멤버 중 한 명인 하인리히 레플러는 회화와 그래픽 디자인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엄격한 구도와 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한 19세기의 회화는 창작자의 감정과 주관으로 중심을 옮겨가며 근대 미술 사조가 본격화될 조짐을 비친다. 하겐분트 협회 초기 기존 회화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레플러는 풍경화를 주로 작업했다. 그러나 이내 관심사가 확장되어 당시 폭풍 유행 장르였던 포스터 및 연극무대의 아트디렉터로도 활동한다. 구스타브 클림트 중심의 분리파에서 독립을 꾀하며 레플러는 좀 더 자유로운 창작을 모색했고 단행본 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처남 요셉 얼반 Joseph Urban과 발행한 동화집들은 초판부터 대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메르헨 소재의 캘린더까지 큰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하인리히 레플러의 <돼지치기>는 무대 디렉션 경험이 묻어나는 소가극 형태로 진행된다. 이 시기 적극적으로 수용한 아르 누보의 영향으로 장식적이고 낭만적인 라인과 자연 요소를 차용한 프레임 안에서 드라마가 진행된다. 창작가적 수정이 가해졌어도 레플러 당대에 아직 유행하던 로코코와 크리놀린 스타일이 입혀져 화려함을 돋운다.

<돼지치기> 같은 안데르센의 초, 중반기 작품 다수는 기존의 민담을 당대의 기준에 맞춰 재구성했기에 세부사항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레플러의 판본에서 구애하는 왕자는 치명적인 미모를 변장한 것으로 설정되었기에 음험한 표정과 더욱 대비된다.

Heinrich Lefler, 1897




윌리엄 히스 로빈슨 William Heath Robinson

대표작 <안데르센 동화집> 수록분이다. 윌리엄 히스 로빈슨은 중세풍 스타일로 연극적인 분위기를 구사하고 있다. 비교적 길지 않은 분량에도 컬러 도판까지 작업되었다.

#눈의 여왕, 일곱 가지 이야기 https://brunch.co.kr/@flatb201/286

William Heath Robinson, 1913




해리 클라크 Harry Clarke

대표작 <안데르센 동화집> 수록분이다. 해리 클라크는 화려한 보색 대비로 마술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클라크 스타일의 돼지가 궁금했는데 얌생이 같은 왕자의 컬러 도판 한 점만 작업되었다.

#눈의 여왕, 빈티지 일러스트 1 https://brunch.co.kr/@flatb201/287

#백조왕자, 빈티지 일러스트 https://brunch.co.kr/@flatb201/217

#함정과 진자, 포의 심연 https://brunch.co.kr/@flatb201/194

Harry Clarke, 1916




마가렛 태런트 Margaret Tarrant

일러스트 장르 전성기인 골든 에이지 시대에도 여성 창작자들을 위한 공식적인 자리는 희소했다. 마가렛 태런트는 <물의 아이들> 성공으로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대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수순처럼 거쳐간 <안데르센 동화집>을 작업했다. 고증은 다소 애매한 중세풍이지만 노래하는 항아리의 간질간질함과 키스당하는 공주만큼 벙찐 흑돼지들의 표정 같은 아기자기한 설정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눈의 여왕, 빈티지 일러스트 2 https://brunch.co.kr/@flatb201/288

Margaret Tarrant, 1919




카이 닐센 Kay Nilsen

연극적 분위기에 관심 둔 시기의 카이 닐센 후기작이다. 역시 <안데르센 동화집>에 수록되어 있다. 마리오네트 극 같은 다소 희화화된 경쾌한 이미지들이다.

#춤추는 열두 명의 공주들, 우리들은 밤새워 춤출 수 있다 2 https://brunch.co.kr/@flatb201/294

#눈의 여왕, 빈티지 일러스트 1 https://brunch.co.kr/@flatb201/287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 마음의 바람이 향하는 곳 https://brunch.co.kr/@flatb201/34

Kay Nilsen, 1924




아서 래컴 Arthur Rackham

창작자들의 취향을 온전히 알 수야 없지만 아서 래컴은 확실히 공주보다는 돼지를 그리는 데서 더 즐거움을 느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빡빡한 액자 구성과 대비되는 느긋한 표정의 돼지들은 어이없는 소동극의 관람객처럼 느껴지지 않나? 대표작 <안데르센 동화집>에 수록되어 있다.

#눈의 여왕, 빈티지 일러스트 1 https://brunch.co.kr/@flatb201/287

Arthur Rackham, 1932




로르 프리드리히 그로어나우 Lore Friedrich Gronau

로코코 풍의 아름다운 수채화인데 검색 이미지 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1940년대 발행된 선물용 하드커버 전집 일부로 추측된다.

Lore Friedrich Gronau, 1940 추정




에바 요한나 루빈 Eva Johanna Rubin

다수의 고전 동화 일러스트를 작업한 에바 요한나 루빈은 장식적이고 컬러풀한 이미지로 인기 높다. 하나하나는 사랑스러운 디테일들을 정교한 기계장치 장난감처럼 맞물리게 해 기괴한 마술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탁월하다. 단행본 <돼지치기>는 인장 같은 화려한 컬러로 장면마다 유쾌하다. 춤추는 돼지들이 너무 흥겨워 되려 배덕감을 느끼게 만드는 일러스트들이다.

#호두까기 인형, 나를 좀 걱정해줘요 https://brunch.co.kr/@flatb201/117

Eva Johanna Rubin, 1982




에릭 블레그바 Erik Blegvad

<The Tenth Good Thing About Barney>, <Rainy Day Kate> 같은 따스하고 서정적인 창작동화와 다수의 일러스트를 남겼다. 탄탄한 데생 덕에 에릭 블레그바의 캐릭터들은 안정감 있으면서도 섬세하다. 대형 월간지 삽화가를 거치며 다져온 날렵한 순발력은 유머러스함을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담백한 수채화만큼 작품마다 따스한 여운을 남긴다.

<돼지치기>는 그림과 안데르센의 고전동화 중 인기작을 묶은 단행본 수록분이다. 인상적이진 않지만 에릭 블레그바 특유의 담백함이 묻어난다.

Erik Blegvad, 1993




리즈벳 츠베르거 Lisbeth Zwerger

고전적인 고적함으로 사랑받는 리즈벳 츠베르거의 단행본이다. 아서 래컴으로부터 영향받고 지향해 온 리즈벳 츠베르거의 고유함은 구전되는 상상을 돋운다. 그래선지 오리지널 스토리보다는 다수의 고전 아동문학 일러스트를 작업해왔다. 특히 그림과 안데르센의 대표작들은 연작 단행본으로도 발간되었다.

#나이팅게일, 뜻밖의 선물 https://brunch.co.kr/@flatb201/138

#호두까기 인형, 어젯밤의 신기루 https://brunch.co.kr/@flatb201/116

#꼬마 헤베르만, 밤은 짧아 달려 꼬마야! https://brunch.co.kr/@flatb201/69

Lisbeth Zwerger, 2009




트로이 하웰 Troy Howell

다수의 고전 아동문학을 작업해 온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이다. 하워드 파일 Howard Pyle로부터 영향받아 고전적인 웅대함과 리얼리즘 화풍을 지향했다. <비밀의 화원>, <정글북> 같은 미국풍 분위기 낭낭한 사실적 묘사의 기프트 북을 다수 작업했다. 트로이 하웰의 <돼지치기>도 선물용 하드커버 <Old-fashioned Story> 수록분이다. 표제로 추측되듯 그림, 페로, 안데르센의 고전 동화 중 대중적인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이미지는 전형적인 미국 풍이지만 구성에 있어 하웰은 20세기 초까지 유행한 ‘…and Othe Stories’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이미지마다 함께 입혀진 21세기 풍으로 재해석된 스타일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어느 작품보다 다양한 판본을 보유한 안데르센과 그림 동화의 세계에서 트로이 하웰의 이 단행본이 특별히 인상적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빈티지함과 별도로 일정 부분은 지나간 시대의 기법이란 인상마저 든다. 그럼에도 트로이 하웰의 작품이 의미 있는 것은 이미지의 ‘의도’에 있다. 수많은 판본들 중 콘텍스트 면에서 이렇게 직접적인 의도를 심은 이미지를 많이 보지 못했다. 민감한 주제의 잠재적 독자에 아동이 포함된다면 어쩔 수 없이 순화되거나 각색되기 마련이다. 하웰의 <돼지치기>는 화풍만큼 사실적 상황 구현에 집중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 백 번의 키스는 공주의 바람이 아니다. 공주가 지탄받아야 할 점은 개인적 욕망에 탐닉해 어리석은 선택을 수용했다는 정도이다. 때문에 <돼지치기>의 상황은 당시에도! 성추행이다. 심지어 왕자의 개인적인 좌절에서 비롯된 치졸하기 그지없는 의도 아닌가?


대부분의 작품들이 꽃송이처럼 아름다운 드레스 무더기나 오만하지만 기꺼이 키스하는 공주를 묘사하는데 반해 트로이 하웰의 이미지는 직관적이고 현실적이다. 성인 독자가 고려된 일러스트를 지향하는 하웰의 연출을 어린이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을까? 해당 이미지를 어렸을 때 봤더라도 어쩐지 넌더리가 났을 것 같다.

하지만 무심코 읽은 어린 시절의 동화들이 우리에게, 특히 여자 어린이들에게 주입해온 흔적들을 더듬어보면 이렇게 가차 없이 현실을 인식시키는 표현 또한 창작자 의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꽃송이 같은 드레스 가림막 아래 강요되고 관습화 되어온 폭력에 대한 증언처럼 말이다.

Troy Howell, 1985





@출처/ The Swineherd, Hans Christian Andersen,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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