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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16. 2019

16일: 가족상봉

타국에서 만나니 더 반가운

오늘만큼은 여행자

지난번 토요일 마닐라 오션 파크를 다녀오면서 가급적 여기 마닐라 베이(Manila bay) 쪽으로는 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오고 가는 길이 여전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반드시 마닐라 베이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작은 시누와 조카가 짧은 일정으로 마닐라에 놀러 왔기 때문이다. 사실 작은 시누의 여행이 나의 마닐라 일정보다 훨씬 오래전에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시누는 3박 4일의 짧은 여행 중에 여행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조우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교사인 작은 고모를 좋아한다. 눈높이를 맞추며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고 늘 칭찬해주시는 고모를 만날 생각에 아이는 아침부터 들떠있었다. 중학교 2학년 사촌 형을 만나는 것은 정작 시큰둥해하면서 고모를 마닐라에서 만나게 된 일이 너무 신기하다며 콧노래에 촐랑촐랑 신이 났다. 오늘과 내일 수업은 쉬기로 했다. 덕분에 이틀 정도는 우리도 느긋하게 여행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나도 보름 만에 처음으로 파운데이션부터 시작해서 볼터치로 끝나는 제대로 된 화장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도 엄마의 화장이 낯선 아이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썹 귀신이라고 부르며 놀렸다. 거울을 보니 오늘따라 눈썹이 조금 진한 것 같긴 하다.)


오랜만에 찾은 SM 몰 오브 아시아는 내가 마닐라에 올 때마다 항상 찾았던 곳이라, (또한 한국과 달리 영업점들의 폐업과 개업의 변화가 거의 없어서) 같은 공간에 겹쳐지는 수많은 기억들과 장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버린 서랍들처럼 뒤섞였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기억의 조각들이 제멋대로 머릿속에서 콜라주 되어버리는 상황에 잠시 멍해졌다.


영화 <인터스텔라> 中


모국어의 힘

만 보름이 지난 후에 처음으로 한국말로 대화할 수 있는 성인을 만나게 되었다. 물 만난 고기가 바로 이때의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작은 시누에게 그동안의 다사다난했던 일들을 래퍼처럼 빠르게 요약해서 전했다. 익숙하고 반가운 추임새와 감탄사가 나를 전율하게 했다. 내 언어로 말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이구나. 그동안 초등학교 3학년 아이와 나누던 제한된 범위의 어휘와 대화 주제는 결코 '수다'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평소 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의 나는 단어와 표현을 고심하고 선별하는 편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교육적으로 올바른 언어가 나오지 않는다. (사실 나는 욕을 못하는 편이 아니다. 시기적절하게 사용되는 욕이 주는 그 찰진 맛을 포기하기 어렵다.)


물론 한국의 가족들과 보이스톡이나 페이스톡을 이용해서 안부를 전하고는 있다. 그러나 마닐라의 인터넷 속도는 늘 불안정하기 때문에 계속 끊기거나 시간 지연으로 5초 길게는 10초 격차로 엉뚱한 동문서답을 하듯이, 혹은 더빙이 잘못된 영화처럼 불편하고 엇나간 대화로 만족해야 했다. 일단 점심식사를 위해 바로 근처에 보이는 아무 식당에 들어갔다. 칠리스(Chili’s)라는 미국식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는데 주문한 메뉴가 한국에서 접한 것과 비슷해서였는지 아이는 음식을 양껏 잘 먹었다. 식사 후 슈퍼마켓에 들러 향기로운 망고와 산미구엘 맥주캔 그리고 아이들 간식을 몇 개 집어서 본격적인 '수다'를 위해 호텔로 옮겼다.


콘래드 마닐라

그간 마닐라에 오면 거의 예외 없이 소피텔 필리핀 플라자 마닐라(Sofitel Philippine Plaza Manila)에 묵었다. 먹는 게 중요한 나에게 풍성한 호텔 조식은 우선되는 선택사항 중의 하나다. 소피텔의 유명한 스파이럴(Spiral) 레스토랑은 모두 맛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조식으로 제공된다. 그리고 아담하기는 하지만 마닐라 베이와 맞닿아 있는 야자수 그늘의 수영장은 남국에서 보내는 휴가를 더욱 인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콘래드 마닐라 호텔


이번에 작은 시누는 SM 몰 오브 아시아와 연결되어 있는 콘래드 호텔에 묵었다. 이곳은 힐튼 계열로 호텔 건물이 크루즈 선박을 모티브로 삼아서 부드러운 곡선의 외관이 눈길을 끈다. 건물 3층에 위치한 로비는 인상적인 패턴의 대형 카펫과 함께 시원하게 뚫린 전면 창으로 보이는 마닐라 베이의 경관이 아주 멋졌다. 이날도 어김없이 굵은 비가 내려서 창 밖으로 보이는 "MOA EYE"라는 이름의 대관람차가 흘러내리는 빗방울 줄기따라 수채화처럼 번져 보였다.


콘래드 마닐라 호텔의 로비


비가 내려도 멋진 호텔 로비의 경관


전망이 좋은 객실에 앉아 마트에서 사 온 망고와 함께 시원한 산미구엘 캔을 나눠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호텔 객실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이는 중학생 사촌 형과는 거의 대화도 나누지 않고 하얀 시트가 깔린 커다란 침대에 엎드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한다. 못 본 채 그냥 놔두었다. 오늘은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말 그대로 '회포'를 풀고 싶었다. 배가 고파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은 호텔 건물 2층에 위치한 파라다이스 다이너스티(Paradise Dynasty)에서 먹었다.


작은 시누가 여행 계획 때부터 엄선한 맛집 리스트에 올려놓은 이 식당은 소룡포(小笼包)를 전문으로 하는 중식 식당이다. 메뉴판에 영어와 함께 쓰여있는 중국어가 눈에 더 잘 들어왔다. 아, 반가워라! 일단 소룡포 세 판, 볶음밥(扬州炒饭), 경장육사(京酱肉丝),  단단면(担担面), 그리고 시금치 볶음을 시켰다. 친절한 종업원이 따뜻한 차 주전자를 내어주자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아이를 위한 메뉴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 본 지 참 오래된 것 같다. (그러나 겨우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나는 음식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저녁식사


주문한 음식이 눈 앞에 펼쳐지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동안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나의 '미각'이 가뭄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이 기회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이도 소룡포와 볶음밥을 아주 잘 먹었다. 특히 소룡포 속 육즙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모두 먹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귀여웠다. 점심과 저녁 모두 주문에 성공한 듯하다. 뜻밖에 먼 타국에서 만나 좋은 음식과 함께하는 하루가 참으로 소중했다. 특별히 한 것도 없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도 못했는데... 시간은 왜 이리도 빠른지.


어느덧 저녁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쉽지만 작은 시누와 조카와는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랩 택시를 타고 오는 길의 마닐라 밤 풍경은 휘황찬란했던 SM 몰 오브 아시아와는 달리 시커먼 어둠 속에서 희미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아이는 몸을 차 창문에 기댄 채 어두운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너와 나 우리 둘이구나."


작고 가녀린 어깨 위를 스쳐가는 가로등의 노란 불빛에 눈길이 닿아... 그렇게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마닐라의 밤을 바라보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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