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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28. 2019

21일: 삼시세끼

마닐라에서 아이와 먹고사는 문제

시간의 질량

브런치에 제목을 쓰면서 놀라웠다. 21일째라니, 이제 열흘 후면 이곳을 떠난다니... 앞으로 마닐라에서 보낼 주말이 딱 한번 남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마닐라에서의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하루하루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토끼가 오물오물 풀을 먹듯이 조용히 잔잔하게 그렇게 보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처럼 나와 아이는 두 선생님들과의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우리만의 작은 세계 속에서 쉼 없이 웃고 떠들었다. 최소한 그레이스 레지던스에서 우리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 점이 불편하면서도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너와 나... 우리 둘만의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와 아이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렇게 온전히 아이와 밀착해서 지낸 때가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젖을 떼고 걸음마를 시작하고 하나둘씩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늘 맞대고 비비던 살갗은 그만큼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새털 같은 시간은 매일의 작은 변화를 감지하기 어렵게 일상의 둔탁한 흐름 속에 모든 것들을 담가버렸다. 그렇게 어느새 나는 사십 대를 훌쩍 넘기고 아이는 보통의 초등학교 3학년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한 몸처럼 붙어 지내던 시절은 기억조차 나지 않고 이제는 각자의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문제들을 전전긍긍하며 풀어내야 하는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아기분 냄새 폴폴 나던 아이가 점점 단단해져 가는 것을 보는 것은 기쁘면서도 서글픈 일이다. 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 같던 시간이 단단하게 굳어져서 결국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처럼, 그동안의 모든 시간과 기억들이 내 아이의 살이 되고 뼈가 되었다. 점점 커가는 아이와 내가 살갑게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줄어갈 것이다. 결국은 내 품을 떠나 세상으로 걸어 나갈 그 뒷모습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가끔은 시간이 멈춘 듯이 천천히 흘러도 좋겠다.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연습이 필요해요


먹고사는 문제

"오늘은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나의 (간절한) 말에 아이는 항상 "그냥 엄마가 만들어 줘!"라는 짧고도 단호한 대답으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꽁꽁 묶어버렸다. 아, 이를 어쩐다. 요리를 썩 잘하지 못하는 나는 좁은 주방과 제한된 식재료라는 불공평한 상황에서 입이 짧은 아이의 끼니를 해결해야만 다. 게다가 아이는 내 요리에 유독 까다롭게 구는 편이다. 야속하게도 엄마의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다.


그동안 담임선생님께 전해 들은 아이는 학급에서 늘 친구들을 배려하고 양보를 잘하는 따뜻하고 반듯한 학생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만큼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었다. (나를 닮아 그런지) 아이는 뜻밖에도 독설과 풍자에 능하다. 특히 나에게 그 숨겨진 능력을 펼쳐 보이기를 즐겨한다. 이럴 때만큼은 어렸을 적에 내가 나의 부모에게 했던 말들과 행동이 어떤 상처로 남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한다.


일단 먹여야 한다. 먹이려면 먹을만한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 아이는 조금이라도 비위 상하는 냄새나 식감에 노출되면 엄살이 아니라 진짜 먹은 모든 것들을 다 쏟아낸다. 예전에는 아이에게 몇 숟갈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서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라고 엄하게 얘기를 했더니 억지로 삼키다가 몽땅 게워낸 적도 있다. "편식은 나쁘다"는 엄마의 강요에 아이는 언제부턴가 밥 먹는 문제를 도덕적으로 여기기 시작한 듯했다. 아이에게 미안해진 나는 이제 먹는 것과 관련해서 어떤 기준이나 지침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먹으면 고맙고 안 먹으면 다른 것을 주었다. 몸에 나쁜 것과 좋은 것도 크게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나에게는 아이가 밥을 잘 먹는 일이 '대한민국 평화 통일'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식사의 기본인 쌀부터가 달랐다. 나야 동남아시아의 인디카 (Indica rice) 혹은 안남미(安南米)를 좋아하지만, 아이에게는 식감부터가 낯설다 보니 처음에는 몇 숟갈 뜨다 말았다. 마닐라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장을 보러 간 것이었는데, SM 몰의 슈퍼마켓의 쌀 코너에 가서 직원을 붙잡고 "두 유 해브 쓰티키 롸이스(sticky rice)?"를 외치며 쌀을 사 왔다. 문제는 일반 안남미와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물을 넉넉하게 잡고 밥을 하니 그런대로 포실포실한 느낌을 낼 수 있었다. 또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지, 아이는 안남미로 한 밥을 점점 잘 먹기 시작했다.


먼저 한국에서 가져온 식재료를 활용했다. 김밥과 유부초밥은 마닐라 체류 초기에 거의 매일 내놓은 끼니였다. 폴폴 날아다니는 쌀알로 초밥과 김밥을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점점 숙련되어갔다. 김밥의 속재료는 한국에서 가져온 단무지와 우엉 외에는 현지에서 모두 조달하였다. 고소한 슬라이스 치즈는 꼭 넣어야 한다는 아이의 요구가 있었다. 그 외에 구운 햄을 넣거나 당근을 올리브유에 볶아서 넣거나 오이를 채 썰어 넣기도 했다. 고맙게도 아이는 남김없이 잘 먹어주었다. 아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설거지를 하고 나면 정작 내 끼니를 챙길 생각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빈 접시를 닦는 일은 즐거웠다.


나를 구해준 유부초밥과 김밥

 

잘 먹어줘서 고맙네요


하루는 SM 몰에서 우연히 김치를 발견했다. 유레카! 평소 김치를 즐겨먹는 아이가 아닌지라 혹시 하는 마음에 반찬으로 내놓았더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치를 찾았다며 넉살을 떨었다. 아삭아삭한 것이 적당히 맛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그 후 작은 병으로는 흡족하지 않아 큰 병에 담긴 김치를 2병이나 집어왔다. 문제는 같은 상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먹은 것과 맛이 완전히 달랐다. 아마도 유통과정 중에 문제가 있었는지 김치는 식초처럼 심하게 익어 있었다. 가격이 꽤 비쌌기에 아까워서 버릴 수는 없었지만,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때부터 김치로 지지고 볶고, 할 수 있는 짓은 다 했다. 나는 김치찌개를 끓여먹고 아이는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줬다. 김치볶음밥 중간에 슬라이스 치즈를 한 장 넣어줬더니 아이는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처리 곤란이었던 쉰 김치


치즈를 넣은 김치볶음밥, 성공!


매사에 무덤덤한 남편은 가끔 카카오톡으로 내가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물었다. 같이 산 세월이 십 년을 훌쩍 넘어가니 남편도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던 모양이다. 끼니를 잘 챙겨 먹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나 사실 내 먹거리까지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아이를 위해 삼시 세끼를 해오지 않았던 터라 마닐라 체류 동안 꼼짝없이 붙잡혀 하루 세 번 밥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 이미 내 역량을 넘치는 일이었다. 내 입 하나는 덜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대충 먹었고 딱 그만큼의 여유를 더 얻을 수 있었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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