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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Mar 13. 2016

"장미, 그리고 기상캐스터 (4)"

네 번째 이야기


2014년 9월 30일, 분기 마감일이었습니다. 마감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에 며칠간은 일과 더불어 흘러가듯이 살았습니다. 연애도 또는 사랑도, 아니면 이런저런 잔 생각들도 시간의 여유가 풍성한 사람들에만 허락되는가 봅니다. 아니면 그만큼 희생해야 하는 삶의 한 부분들이 반드시 있는, 그래서 삶은 전체적으로 볼 때 공평한 듯합니다. 어느 날 저녁, 낮 업무를 끝내고 야간 뉴욕 업무를 준비하던 중, 수정이가 Facebook messenger를 보내왔습니다. 바깥은 아직도 늦여름이 마지막 열기를 뱉어내고 있었고, 그날 밤, 포트폴리오 정리를 해야 하는 뉴욕 관련 업무가 상당히 많았으며 지난 며칠간의 일들의 무게가 상당했지만, 수정이의 메시지에 마음이 한 결에 가벼워지더군요. 미혼이지만 40이 넘은 나이, 이런 느낌을 가져도 괜찮을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영화 잘 봤어요. 무자막으로 한번, 자막으로 한번 봤는데 영어사전 펴놓고 다시 한번 보려고 합니다~ 공감되는 게 많은 영화였어요!”    


“안녕하세요 수정씨. 그래도 두 사람 모두 표준 영어를 쓰는 배우들이라 다행입니다. 최근 영화는 그런 배우가 많이 없고, 속도가 (언어나, screenplay 나 모두) 너무 빨라서 매력이 떨어지지요.”    


“네 생활 영어는 그럭저럭 알아듣겠는데, 전문적인 내용 나올 때는 자막 봐도 모르겠더라고요. 인쇄한 대본+영어사전으로 공부한 다음에 다시 볼 생각입니다^^오랜만에 영어공부~”    


“Script 까지 print 했구나! Script 까지 사용하는 사람은 한국에선 처음 봐요. 저는 대본들을 거의 다 가지고 있으니까 제게 말하세요. 줄게요. 영화를 좋아한다니, 그것도 오래된 영화를 좋아한다니 이유 없이 기쁩니다!”    


“마음에 드는 영화가 있으면 백번이고 보고 자막도 씹어먹습니다^^”    


“그나저나 다른 좋은 영화 (subject matter는 다르지만) 참 많답니다. 원하는 category 나 genre 또는 actor/actress/director 가 있으면 알려줘요. 만약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면 보내줄게요. 저는 지금 Flipped (2010) 보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퇴근했어요?”    


“네 퇴근했습니다!! 보내주신 목록 중에 시민 케인, 펄프픽션, 라비앙로즈… 이렇게 세 개가 눈에 들어왔어요.”    


“Pulp Fiction 은 no comment (하하하) 그리고 la vie en rose는 정말 매료되는 영화! 그런데, Citizen Kane 까지! 어렴풋이나마 수정씨의 선호하는 스타일의 영화가 보일 듯합니다. 이 영화는 다 가지고 있겠지요?”    


“아뇨! 보내주셔야 해요^^장르는 가리지 않고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꼽자면 The Reader, 타인의 삶, La Boum, 글루미 선데이, 굿바이 레닌 정도요~다양하네요^^;;”    


“The Reader (Kate Winslet)는 제 list 에 오르려다가 탈락된 작품! The Lives of Others는 한번 봐야겠어요. 유럽 쪽 작품은 영국까지밖에 못 가봐서, La Boum 은 노래 때문에 가지고 있는 영화! Gloomy Sunday 도 제 List 에 오를 뻔했던 작품. Goodbye, Lenin! 은 독일 쪽 영화군요, 유럽 쪽 (특히 독일 쪽)을 선호하는군요!!! 세 작품은 보내줄게요 - 피곤하겠어요 ~ 저야 수정씨와의 대화가 즐겁지만, 이제 놓아드려야 할 때 아닐까 하는 생각.” 

   

“아니에요~재밌는 대화예요!^^ 언제 시간 넉넉하실 때 좋은 영화 추천 기대할게요^^”    


이렇게 다시 제 삶 속에 영화라는 주제로 발길을 들여놓은 그녀… 이렇게 다시 우리의 이야기는 매일같이 이어졌습니다. 매일 저녁, 1시간 정도 Facebook이란 매개체로 초겨울의 마지막 그날까지 이어진 대화 – 우리의 관계가 끝난 이듬해 봄에 꺼내어 보니 그 양이 상당하더군요. “젊은 날의 초상” 의 내용이었나요, “말이 많아지면 연애는 추상적이 된다”라는 글귀가 떠오르더군요. 우리들의 사이, 물리적인 조건들을 보면 연애라고 볼 수는 없고, 저 또한 그렇게 정의하지 않겠지만, 지난 글들과 많은 이메일, 그리고 같이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찾아보면, 그녀와 저의 관계는 “연애가 아니었다”라고 단정할 수 없는, 서로의 마음을 표현한 흔적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제가 습관처럼 말하던 “26 vs. 42”라는 표현, 즉, 우리 두 사람을 숫자로 표현한 것으로, 웃으면서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이 숫자들은 장벽이며 동시에 보호벽이었고, 행복과 불행을 적당한 선에서 지켜주는 선이었습니다.    


수정이는 다른 20대 후반의 여성들보다는 매우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심성이 지나치다 못해 상당히 강했으며, 인간관계에서도 마치 30대 중반의 그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원숙한, 사회경험이 많은 그녀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젊은 그녀, 겉과는 달리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어떻게 할지 몰랐던 그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리라 추정했지만 정작 혼자였던 그녀는 꼭 이루고 싶은 꿈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했지요. 때마침 제가 전문분야인 쪽에 그녀가 도움이 필요한 듯하여 제가 먼저 그 부분에 대해 물어보고, 결국은 그녀 또한 사생활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을 저와 조금씩, 조심스럽게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초였던 이때부터 우리가 더 이상 만나지 않기 시작한 때까지의 3개월여의 기간 동안 그녀는 제가 도움을 준다는 그 제안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많았었습니다. 독립성이 강한 이유였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녀가 지금까지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조심성, 또는 경계감이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제가 그녀에 비해 나이도 많았고 또한 삶의 경험 또한 한국과 미국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은 깊고도 또한 많았습니다 - 단, 그녀가 아닌 제가 먼저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 속에 들어가고자 했고, 그녀도 제 마음을 이해하였고 그리고 마음의 문을 조금이나마 열어 주었기에 그때부터 많은 계획들을 세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녀를 TV 화면에서 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직장과, 그녀가 국내 대학원에 진학하여 방송계 또는 언론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두 가지였습니다.  


“나는 수정씨를 TV에서 볼 수 없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해요”    


“왜요, 선생님?”    


“직접 이유를 말하기엔 쉽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면 될까… 내 여동생이라면 절대 그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해하겠어요?”    


“네, 이해합니다^^ 걱정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제가 그녀를 도와주기로 한 이상, 우린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지요 –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시작한 이 계획은 대면하여 의논하고 그리고 또 돌아가서 보완하고 그 다음에 다시 만나서 의논을 해야만 하는 종류의 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방 멀리에 있었고 저는 서울 외에는 업무상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없었기에 참 난감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제게 있어서 우리의 만남은 전혀 내키지 않았습니다. 몇 개월 전 방송국에서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그 후의 만남은 우연일 수가 없기에, 즉, 그녀의 외모와 직업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그것, 대부분의 남자들이 아마도 그럴 듯 은근히 기대하는 그것, 즉, 전 미스 코리아 후보 또는 모델 같은 멋진 외모를 가진 기상 캐스터와 한 번 만나보자는 ‘저속한’ 그것 – 그렇게 보이기가 싫었던 저였습니다. 반드시 만나야 한다면, 그녀가 누구이건 간에 그리고 제가 누구이건 간에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의 순전한 만남을 위해 그리고 보다 높은 목표를 위해 (그녀를 돕는다는) 만나는 것임을 전제로 해야 하고 서로 동의함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는 제가 제안한 전제로, 궁극적으로는 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지요 - 하지만 그녀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아마 이 편이 그녀도 편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만나서 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에 우린 고민 끝에 중간 지점인 대전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는 차로 그녀는 버스로 이동하기로 한, 우리만의 독특한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전날 밤은 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줄 것들을 준비하느라 많이 바빴던 날이었습니다.     


10월 16일이었습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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