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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Mar 14. 2016

"장미, 그리고 기상캐스터 (5)"

다섯 번째 이야기


2014년 가을, 특히 우리가 두번째로 만났던 10월 16일은 제가 일생에서 잊지 않을 날들 중 하나일 듯합니다. 오전 일정과 회의를 모두 취소하고 – 이 무모한 결정의 결과는 차후 며칠간 겪어야 했지만 – 오전 10시에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섰습니다. 그날따라 맑은 하늘이었고, 약속시간인 12시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가방에는 그녀가 필요로 했던 자료들과 또한 제가 준비한 외장 하드 드라이브가 있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화 파일들을 넣어놓은 기기였지요. 이것을 구매하는 과정도 여간 신경 쓰였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려가던 길, 수원을 지났을까, 그녀의 문자가 왔습니다.    


“선생님, 저도 버스를 탔습니다. 2시간 후면 도착할 듯해요.”    


“그래요. 나도 가는 길입니다. 곧 만나요.”    


대전 버스터미널 1층 길가에서 우리는 만나기로 했습니다. 근처 coffeeshop이나 restaurant을 미리 알아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장소는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만난 후 결정하기로 했었지요. 제가 도착한 시간은 11시 50분이었고, 터미널을 두어 바퀴 정도 돌았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였지요.    


“선생님, 어디 계세요? 저 도착해서 바깥에 나와 있어요. 터미널 동쪽 문입니다. 보라색 스카프를 하고 있어요. 찾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사람이 많던 목요일 점심시간이었지만, 그녀를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만났던 날엔 인식하지 못했지만, 수정이는 키가 생각보다도 더 큰 여성이었으며, 가을바람에 살짝 날리는 그녀의 단발머리는 가을 햇살 아래 빛나고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마저도 그녀를 쳐다보고, 돌아보며,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녀를 찾기는 매우 쉬웠습니다. 프랑스 디자이너였던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이 “여성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움직임과 또한 그녀의 이미지에서 발산되는 shock effect에서 느껴진다”라는 말을 한 적을 떠올리며, 그녀가 서 있는 길가 옆에 차를 세웠습니다.   

 

남성들은 차에 여성을 태운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그런 남성들 중 한 명인데, 다행히도 저는 업무용 차량과 개인 차량이 있어서, 제 개인 차량에만 이와 같은 ‘의미’를 부여합니다만,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던 제 차에 탑승한 첫 여성이 수정이었지요. 이런 ‘우연이 아닌 우연’을 만들기 위해, 여름에 새로 구입한 제 개인용 차에 여성을 태우지 않으려고 적지 않은 수고를 3-4개월 내내 했던 기억도 또한 있습니다. 지금도 제 차엔 수정이 외로는 단 두 명밖에 탑승한 적이 없다면, 저의 이러한 방식이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차는 남성들에게 있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의미가 남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제 나름대로의 특권을 그 사람에게 부여한다고 할까요?

.    

“안녕하세요!” 하며 차에 올라 탄 수정이는 사실 처음엔 뒷좌석에 탈 생각이었나 봅니다. 뒷문을 열었는데, 제가 “앞으로 타세요”라고 하니, “아, 뒷좌석은 상석이지요? 죄송해요!” 라며 뒷문을 닫고 앞좌석 문을 열었습니다. 아마도 아직은 조심스러움이 있었는지, 뒷좌석에 타려고 했었나 봅니다. 처음 몇 초간은 어색함이 흘렀으나, 우리는 곧 친숙하게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대전에서 같이 보낸 6시간의 일정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가을 하늘을 위로하고 다니던 한산하고 맑았던 대전시 이곳저곳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외모가 뛰어났고 키가 저와 같았던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이 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본 후, 그다음엔 제게 시선을 주더군요. 아마 그들의 생각은 “저 두 사람, 어떤 사이일까?” 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같이 지낸 6시간 동안 제게 쏟아진 시선은 제겐 상당히 난감하기까지 했었지요. 그 날 나누었던 대화들이 마치 방금 나눈 대화였던 것처럼 지금도 기억하며 그녀의 시선, 눈빛, 그리고 웃음소리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여성들이 눈에 붙이는 속눈썹도 제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인데, 그녀가 그것을 한 모습은 전혀 거리낌이 없이 어울려 보였지요. 물론 헤어질 때는 서로가 아주 많이 편해졌지만 그래도 처음 한 시간 동안은 아직은 서로가 낯선 사람이라 조심스렇게 저를 대하던 그녀의 태도 또한 가끔 기억하며 웃기도 합니다.    

 

대전 VIPS에서 같이 식사를 한 후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던 길, 주변이 매우 조용하고 음산하기까지 하여, 궁금하기도 한 나머지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수정씨, 만약 내가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영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면 어떻게 하실래요?”    


이에 대해 그녀는 살짝 웃으며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 26년 인생은 그냥 여기서 끝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야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제가 아는 한, 선생님은 너무 착한 남자랍니다.”    


우린 그다음 그저 하하하 웃고 말았지만, 그리고 제가 그녀에게 줄 선물들 중 하나였던 개인 호신용품 2개를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지만, 이렇게 기쁜 대화를 내가 마음속으로 아끼는 사람과 언제 또 하게 되려나 하는 생각을 지금 하면, 마음이 아련해지곤 합니다.    


“4월과 5월”이라는 duet 이 있습니다. 1970-80년대 duet인데, 1978년에 “장미”라는 노래를 발표하였지요. 이 오리지널 version 이 아닌, 그들이 다시 remake 한 version 이 있습니다. 그 version을 저는 좋아하는데, “당신에게서 꽃내음이 나네요, 잠 못 이루는 나를 재우고 가네요, 어여쁜 꽃송이 가슴에 꽂으면, 동화 속 왕자가 두렵지 않아요”로 흘러가는 가사를 듣고 있으면, “재우고 가네요”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현란한 피아노 연주와 기타줄을 뜯는 소리, “가슴에 꽂으면”이란 부분에서 피아노 키가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흘러가는데, 이 부분을 그녀와 함께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손가락으로 음의 높낮이를 그리기도 하면서 여러 번 부르던 기억… 열어놓은 sunroof 를 통해 스며들던 가을 햇살과 선선한 바람의 향은 그녀의 간간히 느낄 수 있었던 향수의 향과 더불어 제 기억에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이 푸른 가을날의 대전의 추억은 이렇게 기억됩니다. 길고 긴 6시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 하지만 우리 둘에게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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