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에 크게 성공하고 미혼이며 중년인 남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과거의 애인들을 한 명씩 만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면 어떨까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겠지요 - 30년이라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그리고 그 반대로 그들에게 있어 이 남자가 얼마나 생소하게 느껴질지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예전 그 기억과 추억만을 가지고 이들을 찾아 나선다는 일은 아예 하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2005년 작품인 Broken Flowers에서는 Don Johnston (Bill Murray) 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천하의 바람둥이 Don Juan과 유사합니다. 아마도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르나 사실 이 남자는 컴퓨터 사업에 크게 성공한 후 일찍 은퇴하여 편안하게 일상을 살고 있지요. 내성적인듯한 그는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그저 조용히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살기를 즐깁니다. 하지만 그의 젊은 동거녀는 이런 삶을 견디지 못해 그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핑크색 정장을 입은 그녀는 방금 온 우편물들을 집어 들고, 그 가운데 끼어있는 핑크색 봉투를 꺼냅니다. "당신의 또 다른 여자 친구로부터 왔나 봐요"라고 하며 Don을 바라보는 이 여인 - 이 젊은 여성은 그의 주변을 맴도는 여자가 아닌, 결혼을 하고 제대로 된 가정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에게 더 이상 그런 희망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 여인을 별다른 말 없이 문에서 배웅하는 Don, 마지못해 그녀를 막아보지만 떠나는 그녀를 정작 붙잡을 의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녀가 떠난 후 우편물 가운데 그 핑크색 봉투를 유심히 보던 Don 은 봉투를 열고 안에 있는 편지를 읽습니다. 예전에 알던 어떤 여인에게 온 듯한 편지로, 여태껏 알리지 않았지만 이 편지를 쓴 여자는 19살이 넘은 그의 아들을 키웠고, 지금은 그 아들이 아버지를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발송처도 이름도 없는 이 편지를 바로 옆집에 사는 Winston에게 가져갑니다. Winston 은 특별히 직장은 없지만 하루하루가 왠지 바쁜 사람입니다. 추리소설에 아주 심취해서 사는 남자로, 어떤 일이건 간에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습관이 있지요. 그 핑크색의 봉투와 핑크색의 편지를 본 Winston 은 Don에게 이 편지의 출처를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고 부추깁니다. Winston의 채근과 왠지 모를 궁금함으로 Don 은 그에게 그 핑크색 편지를 보냈을만한 여인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어 5명으로 추스른 후 이들을 만나러 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떠난 여정, 그의 추억 속에서 꺼낸 첫 여인은 Laura입니다. 싱글맘으로 closet and drawer organizer 일을 하며 살고 있지요. Don 이 그녀의 집 앞에서 서 있는 모습을 본 Laura는 반가운 얼굴과 의심이 가득한 눈빛을 감추지 못합니다. 저녁을 같이 하고 그녀의 지난날들의 이야기들을 듣지요. 예전에도 아마 그랬었는지, 이 두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하룻밤을 같이 지냅니다 - 하지만 핑크색 봉투와 핑크색 편지와는 아예 어울리지 않는 Laura, 그리고 조금은 협박에 가까운 편지의 내용을 이 털털한 성격의 여자가 계획적으로 썼다고 추정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두 번째로 찾아간 추억의 여인은 Dora입니다. 부동산 중개사로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60년대 후반 "flower child"로 살아온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Ron이라는 남편과 함께 아주 보수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살고 있는 집도 마치 Edward Hopper의 그림에나 나올 듯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보였을까요? 무엇인가에 갇혀있는 듯 극도로 긴장된 모습과 표정을 하고 있던 Dora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Don 이 함께 한 저녁식사 때도 그 태도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거기에 더해 표면적으로는 예의 바르게 보이는 Ron의 Don을 향한 태도가 내심 호의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점차 느끼게 되지요. 아내에 대한 많은 칭찬이 지나칠 만큼 이어지고 Dora의 flower child 시절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Don에게 보여주며 "내 아내 이쁘지요? Dora 만이 내 사랑입니다" 라며 연신 강조하는 Ron을 보며, Don 은 Dora 가 그 핑크색 편지를 보낸 사람이기는커녕 예전과는 너무나 달리 무엇인가에 심하게 속박을 당한 채로 자신의 삶조차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 번째로 찾아간 Carmen 은 "animal communicator"입니다. 그녀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비서의 왠지 모를 견제를 느끼며 이 여자와 대화를 나누어보니 이 사람 또한 - Laura와 Dora 가 아니었듯이 - 그 핑크색의 봉 투과 편지가 Carmen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다음으로 찾아간 Penny 도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이었던 어떤 일로 인해 그에 대한 Penny의 적대감은 상당했지만, 이렇게 드러내 놓고 분노를 드러낸 Penny의 모습을 보며 그녀 또한 Laura와 Dora 그리고 Carmen 이 아니었듯이 그 핑크색의 봉투와 핑크색 편지의 주인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남편인지 또는 동거남인지는 모르지만 Penny를 뒤로 하고 떠나던 길에 Don 은 어느 남자로부터 몇 대 심하게 얻어맞고 정신을 잃습니다.
상처를 엉성하게나마 추스르고 마지막 여인을 찾으러 가던 길에 어느 꽃집에 잠시 들릅니다. 마지막 여인이 묻혀있는 묘지에 가져다 놓을 꽃을 사기 위해서였지요. 아마도 이 여정에서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은 이 꽃집을 운영하는 Sun Green이라는 젊은 여자뿐이었던 듯합니다. 상처를 만져주고 그의 여정에 미소까지 던져주는 친절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렇게 싱겁게 끝나버린 여정을 통해 많이 변해버린 그의 과거 연인들을 만나게 되고, 이를 통해 그가 인식하지 못했던 점들 - Don 은 그가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 네 명의 여인들의 태도와 눈빛 그리고 이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알게 되지요. 결국 그는 아들을 찾는 일보다는 어떤 closure를 원해서 이 여정을 시작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단지 그의 흔적들을 돌아보며 그가 알게 모르게 행한 지난 일들이 지금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는지에 대한 궁금함과 그리움, 그리고 사업 외에는 대체로 후회로 남는 그의 삶에 대한 외로움 등을 Don의 여정이 마무리가 되어 갈수록 느끼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들일지 모르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같은 동선이었는지, 아니면 우연일지 모르지만 젊은 청년 한 명과 맞닥트리게 되지요.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Don 은 그 청년과 같이 어설프게나마 식사를 같이 합니다. 그리고 그의 가방에 매여있는 핑크색 리본을 보게 되지요.
과연 이 청년이 그의 아들이었을까요, 아니면 이 청년이 달아난 후 어느 차를 타고 나타난 괴이한 얼굴의 남자 (Bill Murray 의 실제 아들입니다) 가 Don의 아들일까요?
프랑스와 미국의 합작영화라 그런지, 역시 끝이 매우 괴상하게 마무리됩니다. 이래서 프랑스인이 조합된 영화는 기피하고 싶은 것임에 틀림이 없지요. 하지만 Bill Murray의 연기는 참 대단합니다. 그가 나온 영화는 아무리 엉망으로 준비되었더라도 그를 통해 보고 느끼는 것들이 참 많더군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저도 제 과거의 여인들에게 (이렇게 쓰니 마치 꽤나 놀았던 사람 같군요) 이메일을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과거의 사람들은 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대할까요? 매우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