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y Gwon Mar 14. 2024

돌볼 용기(Courage to Care)_보호자편


30대가 되면서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했다. 메신저 프로필에는 결혼사진과 아기사진이 많아졌다. 친구들은 결혼, 출산, 육아를 하며 여태 경험하지 못한 행복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제적 문제나,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문제나, 시댁 또는 처가와의 문제나, 아이 건강문제 같이 현실적인 어려움도 겪고 있었다. 예전에는 길에서 예쁜 아기가 탄 유모차를 보면 아기만 눈에 들어왔는데, 친구들의 고충을 들은 후에는 유모차를 끌고 있는 부부의 안색부터 살피게 되었다. 부모가 되면 아이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 다 자기 탓인 것만 같고, 아이에게 행여나 해가 되는 것은 없을까 금이야 옥이야 아이를 보호하게 되고,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희생정신이 발휘되는 걸 자주 보았다. 소아과에 내원하는 아이 부모님들이 평소에는 합리적이고 관대하다가도 아이 문제에 있어서는 작은 것에도 집착하고 예민해지는 경우를 종종 보는 것도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그만큼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그만큼 책임이 따르는데 심지어 그 생명이 가족이라면 그 무게는 엄청날 것이다. 생명이 다해가는 환자를 돌볼 때에 그 가족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울까. 나와 함께 나누는 이 음식, 이 대화, 이 사진이 환자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애틋함과 자칫하면 자기 실수 때문에 환자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고통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그 가족이 느낄 부담은 엄청날 것이다. 


영국 런던 R 호스피스의 가정방문에서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간호하는 남편을 만났다. 부부 모두 머리가 희끗한 70대 고령이었다. 아내는 자궁경부암이 전신에 퍼진 말기 환자로, 스스로 거동을 못하고 섬망이 심해서 현재 장소와 날짜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남편은 스스로를 챙기기도 힘들 나이에 아픈 아내 간호까지 맡아서 하고 있었다. 다른 보호자는 없이 남편이 홀로 하루종일 아내를 보살피고 있었다. 노부부를 만나러 가기 전 방문 간호사 선생님이 그분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내는 젊을 때 끔찍한 성폭행을 당해서 트라우마로 고통받았다. 그러다 다행히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남편은 사랑으로 아내의 상처를 보듬어주어 결혼생활 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자궁경부암이 발병했고 자궁경부암은 아내에게 과거의 성폭행 트라우마를 상기시켰다. 아내는 불안해하고 현실감각을 잃고 섬망에 빠졌다. R 호스피스에서 환자 컨퍼런스 때 이 환자에 대해 다루었는데 당시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서 여성 생식기 암이 과거 성폭행 피해 경험을 상기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하셨다. 암이 진행되면서 섬망은 점차 심해졌다. 약으로 조절을 하려고 해도 환자에게 천식과 약 알레르기가 많아서 약을 쓰기 힘들었다. 비록 아내 환자는 스스로 명확한 의사표현이 힘들었지만 지극정성인 남편 보호자는 아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서 의논이 수월했다. 약 알레르기 때문에 약을 바꾼 적이 많은 데다 약 이름이 어려울 법도 한데, 언제 무엇 때문에 무슨 약을 어느 정도 용량으로 썼고 당시 어떤 부작용 때문에 무슨 약으로 바꾸었는지 남편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이번에 섬망이 악화되어 약을 바꾸어야 했는데 또 부작용이 생길까 봐 걱정 가득한 눈으로 간호사 선생님을 보셨다. 


간호사 선생님은 남편 보호자의 하소연을 한참 들은 후에 오늘 R 호스피스에서 회의를 통해 약물을 어떻게 변경하기로 했는지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쓸 수 있는 약물은 무엇인지, 그 약의 부작용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설명하고, 부작용이 생겼을 때 어떻게 처치하면 되는지 이야기했다. 알레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쓸 수 있는 약에 한계가 있지만 섬망이 심하니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낮은 용량부터 조금씩 약을 써보자고 하셨다. 그러자 남편 보호자는 너무 고마워하며 이렇게 설명해 주는 의료진이 없었다며 안심된다고 하셨다. 아내 환자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방문하는 간호사 선생님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남편 얼굴은 알아보고 남편 목소리에는 반응했다.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수십 년 동안 쌓인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다. 남편은 아내의 모든 것을 아는 듯했다. 아내가 침대를 어느 각도로 해서 앉아있는 걸 좋아하는지도 알고, 간호사 선생님이나 나는 못 알아듣는 아내의 웅얼거림을 남편은 정확히 알아듣고 대화를 하는 등 남편의 신경은 온통 아내를 향해 있었다. 


남편 보호자의 지극정성을 보고 꼭 응원을 해드리고 싶어서 마지막 인사를 할 때 ‘말기환자를 볼 때 돌볼 용기가 필요한데 굉장히 용감하신 것 같다. 감동받았다.’고 말씀드리니 남편 보호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히려 당신께서 내게 고맙다고 하셨다. 집을 나와서 간호사 선생님께 남편 보호자가 참 대단해 보이면서도 위태로워 보인다고 했다. 아내가 머지않아 사망하고 나면 남편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랬더니 간호사 선생님도 남편 보호자를 주시하고 있다고 하셨다. 아내를 돌보느라 남편은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다른 보호자도 없고 남편 보호자가 무조건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간호해야 한다고 완강하게 주장해서 남편 보호자를 위한 케어를 하기 힘들지만 가정 방문할 때마다 의료진이 남편의 상태도 살피고 있다고 하셨다. R 호스피스는 사별 클리닉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어서 아내 사망 전후에 남편을 위해 신경 쓸 것이라고 하셨다. 


R 호스피스 병동에 새로 입원한 환자가 있었다. 할머니 환자셨고 첫째 딸이 간병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영어를 거의 못하셔서 주치의인 의사 G는 주 보호자인 첫째 딸과 면담했다. 면담을 시작하자 첫째 딸은 엄마의 상태에 대해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대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변비일 때 변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 며칠 동안 변비상태였다가 무슨 약을 쓰니 설사가 며칠간 나왔다든지, 며칠 동안 대변이 어떻게 변했는지 브리스톨 대변 척도(의학에서 대변을 굳기와 모양에 따라 분류한 척도)를 써가며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귀 기울여 듣다가 대변 이야기를 몇십 분 동안 듣고 있으니 이야기를 끊고 다른 병력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의사 G를 보니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 다되도록 대변 이야기를 하는데 저렇게 귀 기울일 만큼 중요한 이야기가 맞나? 딸 보호자의 기나긴 대변 이야기도 당황스러웠지만 의사 G의 경청하는 태도 또한 당황스러웠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1시간쯤 지나자 딸 보호자가 이제야 다른 증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면담 초반에 빠른 말투로 쏟아내듯이 말하던 것과 달리 말투와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제야 의사 G도 질문을 하기도 하면서 대화가 이루어졌다. 한국에서도 처음 보는 환자를 진료할 때 병력을 파악하느라 보통 시간이 걸리는 편이긴 하지만 길어야 20-30분이다. 그런데 그날 의사 G는 딸 보호자와 결국 2시간이 넘게 면담했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한국 의료에 비해 영국 의료는 효율성이 낮고, 여기가 호스피스라서 으레 저렇게 하는 것인가 했다. 


그다음 날 R 호스피스에서 환자 컨퍼런스를 하는데 의사 G가 그 환자에 대해 보고했다. 딸 보호자가 환자의 대변 양상에 집착하고 있고 말을 끊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을 쏟아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은 다른 의사들도 딸 보호자가 극도의 중압감과 불안 상태임을 알고 딸에게 꼭 쉬고 오도록 하기로 결론이 났다. 알고 보니 영국에서도 아무리 처음 보는 환자여도 2시간씩 진료를 보는 것은 드물고, 의사 G도 대변이 의학적으로 중요해서 딸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의사 G는 딸 보호자의 불안을 알아채고 일부러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들어준 것이었다. 의사 G의 배려와 대처가 놀라웠다. 몸이 배배 꼬이고 몰래 시계를 확인하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렇게 라포가 형성되고 나자 딸 보호자는 의사 G를 부드럽게 대했고 하루씩이라도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고 오자 더 이상 말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말기 환자의 보호자는 이처럼 엄청난 압박을 느끼고 쉽게 번아웃이 올 수 있다. 자궁경부암 환자의 남편 보호자가 강박적으로 모든 약을 다 외우고 약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것이나, 딸 보호자가 어머니의 대변이 어떻게 변하는지 집착하는 것 모두 그들의 책임감이 그만큼 무겁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극성 보호자라든지 의료진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으로 치부한다면 보호자는 더욱 날카로워지고 환자도 편안한 돌봄을 받기 힘들 것이다. 가족은 말기 환자 돌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그들이 후회 없이 마지막 시간을 최대한 같이 누릴 수 있도록 의료진의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단 걸 배웠다. 보호자의 중압감과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가족들에게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의료진이 같이 고민하고 도움을 줄 것이며 옆에 있을 것이라는 지지가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