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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Mar 16. 2024

슬픔을 견딜 용기


일본 S 대학병원에서 사별 클리닉을 참관할 수 있었다. 사별 클리닉이라고 해서 사별 이후 유족 돌봄만 하는 줄 알았는데 사별 이전인 예비 유가족도 케어를 하고 있었다. 40대 여성이 진료를 보러 들어왔는데 양쪽 어깨에 부피가 큰 이불과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저번 주 사별 클리닉 진료에서도 그렇게 무겁게 짐을 가지고 오셨던 게 특이해서 기억을 하고 있었다. 20살 외동아들이 백혈병으로 이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셨다. 아들은 골수 이식 후 거부반응 때문에 말기 환자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원래는 아들에게 유일한 낙이 먹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장출혈 때문에 먹지도 못하고 말할 기운도 없어서 처져있는 데다가 안면마비까지 와서 더더욱 말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엄마로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감정 조절이 힘들어서 진료를 보러 오셨다. 말기 환자인 경우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면 퇴원해서 집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분의 아들은 병세가 위중해서 말기 환자임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병원에서 지내야 한다고 했다. 아들이 조금이나마 집처럼 느낄 수 있도록 집에서 이불과 시트를 가지고 다니느라 엄마는 이렇게 매번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엄마 환자는 매일 오늘이 아들과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들의 주치의가 할 말이 있다고 엄마를 부르면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했다. 말기이다 보니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는 대화를 해보라고 권해야 하는데 교수님께서 이 환자분께 그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고 하셨다. 이런 경우에는 비슷한 환자들끼리 만나 그룹치료를 하면서 대화 연습을 할 수도 있고 위로를 받을 수도 있어서 그룹치료를 권하셨다. 호스피스라고 하면 말기 환자를 돌보는 것만 생각했는데, 사별클리닉을 따로 전문적으로 운영할 만큼 말기 환자의 가족 또한 호스피스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분야라는 것을 알았다. 그 병원에서 사별 클리닉은 정신과 교수님께서 담당하고 계셨는데, 세부전공이 말기 환자의 정신 건강을 다루는 정신종양학이라고 하셨다. 


정신종양학(Psycho-Oncology)이란 암이 환자의 신체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암의 심리적, 사회적, 행동적 측면에 대해 연구하는 종양학의 하위 분야를 말한다. 예를 들어, 암환자가 치료 전후에 불안이 심해서 다음 치료를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를 다룰 수 있다. 특징적인 것은 사별 클리닉에서 볼 수 있듯이, 암환자뿐 아니라 그 가족 또한 중요한 치료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에서 굵직하게 다루는 분야는 우울증, 조현병, 중독 등이고 정신종양학은 보다 세분화된 분야라 생소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정신종양학자가 가장 많은 일본에서 실습하면서 정신종양학이 어떤 분야인지 배울 수 있었다. 


하루는 사별 클리닉에 40대 부부가 찾아왔다. 딸아이가 백혈병으로 죽은 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아내를 먼저 면담했는데 10년이 지나도 죽은 딸의 방을 치우지 못했고, 딸아이 친구가 어느덧 성인이 되어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에 마음이 이상해졌다고 했다. 죽은 딸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을 떠나지 못하던 부부는 이제야 이사를 하고 딸아이 방을 치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기까지 10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중에 남편을 따로 면담하는데 딸의 방을 치우기로 한 것이 하늘에 있는 딸에게 미안하다며 기도했다는데 울먹이며 ‘미안해’라고 하는 아빠 환자를 보며 먹먹해졌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10년이 지났음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니, 감히 고스란히 전해졌다고 할 수 없는 깊이의 슬픔이었다. 또 다른 환자는 9살 아들이 자살한 후 내원한 엄마 환자였다. 일본에서 매년 5월에 열리는 카부토(남자아이들을 위한 축제)에 도저히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이 환자뿐만 아니라 아이를 잃은 부모는 매년 새해를 비롯한 명절, 졸업식, 입학식 등을 지내기 어려워한다고 한다. 아이에 대한 감정과 기억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환자는 생전 금슬이 좋았던 부부 중 아내 환자였다. 남편이 먼저 사망한 후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남편이 없는데도 식사시간마다 아이들에게 위층에서 아빠 보고 내려와서 식사하시라고 하라는 말을 했다. 처음에 이런 증상으로 병원에 왔을 때 현실 감각이 없는 증상을 치료했더니, 남편이 사망했다는 현실을 마침내 자각하고는 오히려 우울증이 와서 다시 진료를 받고 있었다. 이처럼 정신종양학에서는 유족들의 고통도 다루고 있었다.


사별 클리닉에서 종종 돌아가신 분의 사진을 꺼내 보이는 분들이 계셨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족의 눈빛은 슬프다는 말로는 다 담아내기 어려웠다. 어떤 마음일까. 그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기 위해 내 경험 안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 때를 되짚어 보았다. 돌아보면 내게 사진은 늘 마음 한쪽을 아리게 만드는 존재였다. 사진을 찍던 그때나, 보고 있는 지금이나, 행복하든 행복하지 않든 상관없이, 좋았던 기억이면 좋았던 대로 안타깝고, 안 좋았던 기억이면 안 좋았던 대로 안타까웠다. 그때의 나를 다시는 볼 수 없음에, 나는 어쩌면 사진을 볼 때마다 매 순간 과거의 나와 주변 상황에 애도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물을 움켜쥐려는 것 같은 덧없음을 느꼈던 것 같다. 


유족이 힘들어할 때 그를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게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위로해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족들이 힘들어하는 가장 큰 원인이 ‘섣부른 위로(unhelpful support)’이다. 주변에서 섣부른 위로를 듣고 더 상처받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놀랐던 것은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대표적으로 상처를 주는 말이 바로 ‘다른 아이를 가져보라’는 말이란 것이었다. 그 외에도 남편을 잃은 아내 환자가 있었는데 그분의 친어머니는 딸의 슬픔이 깊고 오래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해했다. 시간 있으면 하고 싶은 것도 좀 하라고 그분을 다그치곤 했다. 하지만 그 환자는 남편이 사망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안간힘을 써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몇 년쯤 지났으면 이제 괜찮아질 때도 되지 않았냐는 다그침을 들으며 그녀는 그 이해받지 못함 때문에 더 힘들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지속되는 시간을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정상 비정상이라고 나눌 수가 있을까. 섣부른 위로의 또 다른 예시가 있다. 아이를 10살에 암으로 잃은 엄마가 환자로 내원했다. 환자 친구가 환자분에게 '너는 그래도 아이를 10년은 키우면서 행복한 기억이 있으니 다행'이라며 자기는 임신 중에 유산을 해서 그런 기억조차 없다고 해서 상처가 되었다고 한다. 


상황을 보면 상대방이 일부러 환자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음에도 그 말이 환자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에게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서 실수하기 십상이었다. 유족에 대한 적절한 위로(helpful support)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잃는 경험은 드문 것이 아니라 누구나 죽고 누구나 유족이 되므로 애도반응에 대한 인식개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의료인인 나조차도 어떤 말이 유족에게 도움이 되고 어떤 말이 유족에게 상처가 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의료인과 일반인에게 적절한 위로와 섣부른 위로에 대해 교육하면 되지 않을까 하며 질문을 했는데 H 교수님께서는 일반인들이 필요성을 못 느끼고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에 대한 교육은 효과가 크지 않다고 하셨다. 그래서 유족을 보호하기 위해 유족에게 무엇이 적절한 위로이고 무엇이 섣부른 위로인지 그 예시를 교육하신다고 했다. 섣부른 위로를 듣더라도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만큼 유족의 애도반응에서 적절한 위로가 중요하다고 하셨다. 적절한 위로를 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연락을 하면서 그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장보기나 청소나 요리 같은 일과를 도와주고, 사람마다 애도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조언하지 않으며, 애도반응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충분히 기다리며 들어주는 것이 좋다. 그에 반해 섣부른 위로는 사별 가족이 아직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슬픔을 헤아리기보다 함부로 괜찮을 거라고 하는 말이 많은데, 대표적인 예시로는, 바쁘게 지내라든지,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든지, 남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힘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수년씩 오래갈 수 있다. 상처가 깊은데도 죽음은 무거운 주제라 쉽게 주변에 이야기할 수도 없다. 일반인이 쉽게 위로할 수도 없다. 우울증도 쉽게 동반한다. 우울증 전조증상으로 신체증상이 먼저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신체 질환을 다루는 의사들 대부분은 검사에서 이상이 없으면 그것으로 진료를 끝낸다. 그러면 우울증이 악화되다가 자살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 H 교수님께서는 당신의 임상경험에 따르면 사랑하는 이가 사망한 이후 유족의 내적 성장은 보통 사별 후 5-6년 뒤에 나타난다고 하셨다. 이처럼 애도반응은 충분히 회복하는 데에 5-6년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우울증이 쉽게 오고, 신체 증상을 호소하기도 하는 과정임을 아는 것이 유족을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에 중요하다고 하셨다. 


사별 클리닉을 참관하면서 말기 환자는 개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배웠다. 환자를 볼 때는 그를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들까지 고려해야 하는구나. 환자가 죽음을 잘 받아들이도록 돕는 것뿐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이 겪을 사별의 아픔을 돌보는 것도 정신종양학의 중요한 분야구나. 유족들은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저마다 가슴에 응어리 하나씩 품고 살아가고 있구나. 차라리 어디 보이는 곳이 아프면 주변에서 이해라도 해줄 텐데. 다른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가족들에게도 말 못 하고, 주변에도 말 못 하는 어려움이 있구나. 그럼에도 세상이 그럭저럭 돌아간다는 것이 안쓰럽기도, 다행스럽기도, 서글프기도, 위태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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