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사별 클리닉을 참관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40대 여성 환자분이 오셨다. 4년 전 남편이 사망한 후 지금까지 진료를 받고 계셨는데, 평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어서 애도반응이 길어졌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번 진료 때 환자분 상태가 꽤 좋아지셨다. 이전까지는 남편 사망 후 홀로 세상에 남겨졌다는 느낌이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남편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남편이 생전에 ‘둘이 함께’라는 말을 좋아했다고 한다. 예전에 남편과 함께 생각하던 것과 약속한 것을 마음에 지니고 이것을 단단한 밑받침 삼아 다시 현실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변화하고 있다고 했다. 교수님께서는 이런 케이스가 1년에 한두 명에서 볼까 말까 한 성장이라고 하셨다. 정신과에서 유족을 치료할 때 목표로 삼는 것이 바로 내적 성장인데 이 환자분이 그 예시라고 하셨다.
그런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편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남편과 이어져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직도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서 왜 내적 성장인지 모르겠다고 교수님께 질문드렸다. 그러자 교수님께서는 역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유족의 이상적인 내적 성장은 어떤 모습인지 물어보셨다. '음… 연애 후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는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이별이든 죽음이든 떠난 사람의 흔적이 순간순간 떠올라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였다가 점차 무뎌지는 것이니까요. 시간이 많이 지나도 여전히 그 사람이 생각나긴 하지만 그때 떠오르는 생각은 일상적인 생각과 똑같은 느낌이 되어 더 이상 아프지 않아 지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님께서는 아프지 않은 것에서 더 발전해야 한다고 하셨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문득 해리포터의 번개 흉터가 떠올랐다. 그 흉터가 해리포터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해리포터에게 앞으로 삶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던 것처럼, 사별의 아픔도 잘 극복하면 그런 해리포터의 흉터 같은 존재가 되는 것 같다고 했더니 교수님도 끄덕이셨다. 그 환자분이 남편과 연결된 느낌을 받는 것도 사별의 흉터가 잘 아물어서 환자분의 정체성을 이루고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문득 '둘이 함께'의 의미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 이야기의 교훈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세상을 떠나 지하에 있는 죽음의 세계에 있던 아내 에우리디케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 남편인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신들의 마음을 움직여 허락을 받는다. 단, 지하 세계를 빠져나갈 때까지는 아내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아 불안해진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를 돌아보고 아내를 또다시 잃게 된다. 이 신화를 해석하는 어떤 이는 이것이 애도하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모순이자 과제라고 한다. 고인이 된 사랑하는 이를 다시 삶으로 데려와 미래로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초조하게 뒤돌아보며 확인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가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 내가 만난 아내 환자는 그 과제를 멋지게 해결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이어서 ‘Negative Capability(불확실성을 견디는 힘)’라는 말을 알려주셨다. 답이 나오지 않는 불확실한 상황을 견디는 힘이라는 뜻이다. 그 힘을 기르는 것이 사별 가족이 성장하고 회복하는 데에 핵심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그러고 보면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는 아웅다웅 살고 있다. 어제까지 나와 말도 잘하던 사람이 오늘 이 세상에 없기도 하고, 별이라도 따 줄 것 같던 연인이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험한 세상에서 이 사람만은 믿어도 된다고 여겼던 친구가 내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다니기도 하고, 음식점을 열려고 했는데 코로나19가 터지기도 한다. 미래에 관해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죽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가올지 모를 죽음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현명한 태도는 무엇일까? 이리저리 치이며 살다 보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들이 너울처럼 내게 밀려오면 난 그저 개구리밥마냥 묵묵히 그 너울에 몸을 내맡겨야 한단 걸 어렴풋이 알게 됐다. 정신없이 휩쓸리다가 옆에서 나처럼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다른 개구리밥들을 보다 보면 나를 뒤덮는 물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세상, 참 재밌네.'하고 그저 웃음이 나기도 했다. 김상용 시인의 시구에서 ‘왜 사냐건 웃지요’와 같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개구리밥이 된다는 건 포기도, 실패도, 나약함도 아니다. 오히려 너울을 받아들이고 넉넉하게 흔들리는 힘이다.
이 너울을 일으키는 존재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초월적 존재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한 적이 있다. 우주 공간 가득 거미줄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그는 거미줄 사이를 유유자적 돌아다니다가, 하프 연주를 하듯 거미줄을 무심하게 퉁하고 튕긴다. 그 진동이 거미줄 양끝으로 퍼지는 동안 거기에 닿아있던 다른 거미줄도 덩달아 떨린다. 무심한 손짓 하나로 생긴 울림은 너울너울 전해진다. 그리고 그 진동은 고스란히 이 세상에서 너울로 나타나 넘실대는 것이 아닐까. 초월적 존재를 없앨 수는 없다. 얽히고설킨 거미줄의 진동 방향을 예측할 수도 없다. 난 개구리밥이다, 큰 물결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개구리밥끼리 뭉친다고 물결을 멈출 순 없다. 다른 개구리밥이 내가 겪을 물결을 대신 맞아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 혼자 이 너울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
내 미약한 존재를 알아주는 다른 존재가 있다는 위안,
보잘것없는 내 존재가 또 다른 미약한 존재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위안
그것으로 불확실성 속에서 넉넉히 흔들리며 살아내는 것이다. 그 위안을 사랑이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