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y Gwon Mar 26. 2024

어떻게 죽고 싶으세요?

“그럼 너는 어떻게 죽고 싶은데?” 


웰다잉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과 영국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면 자주 듣는 질문이다. 어디에서, 어떤 표정을 하고,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할까? 아프진 않을까? 가족을 힘들게 하진 않을까? 내 사망진단서에 적힐 사망원인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고 여러분이 한 번쯤 생생하게 상상해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 보통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글쎄. 내 생각에 그건 우울증이 깔려있어서가 아니다. 내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해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잘 준비해서 그 시간이 다가왔을 때 충분히 누리려는 것이다. 누구나 죽을 것이란 미래를 아는 이상 잘 준비해서 만끽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은 암과 뇌졸중이고 임종 장소는 보통 병원 중환자실이나 요양병원이다. 나 또한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될 것이다. 24시간 쨍한 불빛 아래 삐삐 거리는 기계음을 들으며 뻣뻣한 병원 시트로 감싼 병원 침대에 누워있을 것이다. 코, 입, 팔, 다리, 몸통 어딘가에 관이 꽂힌 채로 말도 못 하고 수시로 피검사를 받고 수액을 맞느라 몸은 부어있을 것이다. 보호자는 한두 명만 정해진 시간에 잠시 보고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은 나 홀로 누워있다가 앞 환자 심폐소생술 하는 것도 보여서 불안해하다가 사망할 것이다. 병원 실습을 돌면서 이 현실을 보고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이게 내 미래라니. 나는 생애 말기에 이런 처치를 받고 싶지 않은데 내가 의사가 되면 이런 처치를 환자에게 해야만 한다니. 필요한 처치라면 당연히 해야겠지만, 필요한 처치의 범위는 환자 상태에 따라 다를 것이므로, 결국 환자와 의사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한 처치가 환자의 마지막 모습을 정할 것이다. 나는 한 인간으로서 잘 죽고 싶고, 한 의사로서 환자의 마지막을 함께 결정할 때 떳떳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죽음에 대한 건강한 가치관이 필요했다. 지금도 계속 배워가는 중이지만 분명한 것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려워만 할 때에 비해서 지금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단 것이다. 어떻게 죽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다.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를 보면 늘 가족과 함께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혼자 오는 사람도 있다. 젊으면 그래도 덜한데 나이가 지긋하신 환자분이 혼자 오시는 것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을 때가 있다. 대학병원은 젊은 내가 가도 길이 헷갈리고 절차가 복잡하다. 분명히 예약을 했는데도 진료 과에서는 접수처에 들렀다가 다시 오라고 할 때가 있다. 어떨 때는 무인 수납을 해도 되는데 어떨 때는 꼭 사람이 있는 수납 창구를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검사는 진료실에서 떨어진 다른 곳에 찾아가서 해야 한다. 표지판을 따라갔는데 어느 순간 표지판이 사라져서 어디로 가야 할지 두리번거리게 된다. 주변에 물어보려고 해도 다들 바빠 보이고 겨우 물어보더라도 상대는 내 눈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귀찮다는 듯 설렁설렁 잘 들리지도 않게 대답한다. 어떨 땐 말 자체는 존댓말인데 짜증을 꾹꾹 누른 말투로 대꾸해서 되묻기도 머쓱하게 한다. 몸이 아파서 힘도 없는데 이리저리 다니려니 평소보다 몸도 머리도 느리게 움직인다. 그렇게 병원에 다녀온 날은 내가 짐짝 취급을 받은 것 같아 서럽기도 하고 나이 들면 더 심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께서 병원에서 겪으실 일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께서 병원에 가실 일이 있으면 되도록 같이 간다. 진료를 받을 때도 이런데, 생애 말기에 쇠약해져 병실에 있을 때는 어떨까. 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두렵고 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한데,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누군가가 없다면 어떨까. 어차피 인생의 어려움은 홀로 겪어내야 하는 것이지만 곁에서 '너 참 잘하고 있어.', ' 덕분이야. 고마웠어.', '널 잊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떨까. 죽음을 홀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출산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해야 하는 상황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내 곁을 지켜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은 생애 말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신체건강, 기대수명, 기억력, 치매의 정도, 삶의 질을 포함한 모든 것을 결정한다. 결국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내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연결 대상은 꼭 가족이나 친한 사람일 필요도 없고, 사람일 필요도 없다. 그 대상은 신이 될 수도 있고, 반려동물이 될 수도 있고, 의료진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까지 다른 생명에게 친절을 베풀고, 나와 남을 애틋하게 여기고,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주는 것, 생애 마지막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것, 더 나아가 남겨질 후손과 다른 생명을 위해 내가 머물다 가는 이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러한 관계를 단단하게 한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의료진과 옆 침대 환자에게 웃어준다든지, 칭찬을 한마디 건넨다든지, 농담을 한다든지 함으로써 내가 상대방의 인생을 잠시나마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미국에서 완화의료 전문의로 일하는 의사 L은 인터뷰에서 ‘환자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슬프게도, 아프게도, 웃게도, 행복하게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환자에게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내가 어떤 이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내가 이 불확실한 세상에 단단하게 마음의 닻을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잘 준비된 죽음이다.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다. 죽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면 죽음에 가까울수록 불안정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가면 더 이상 의학적으로 환자를 위해 해줄 것이 없어서 끝이라는 편견 때문에 호스피스 이용률도 낮고 최대한 늦게 오려고 한다. 2021년 통계청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국내 호스피스 이용률이 25%가 채 되지 않고 그마저도 호스피스 기관에서 머무는 기간이 사망 전 3주 정도뿐이다. 게다가 가족과 환자의 요구가 다른 경우에는 남은  시간을 우왕좌왕하느라 보내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가족은 끝까지 환자를 위해 무슨 처치라도 해달라고 하는데, 환자는 너무 힘든 치료는 그만하고 싶어 한다면, 서로 실랑이를 하느라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또한 살아온 시간을 잘 마무리 짓지 못하고 후회가 가득해서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만 곱씹는 것도 남은 시간이 너무 아깝다. 


죽음을 잘 준비하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난 삶을 돌아보며 정리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서있기도 힘든 말기 암환자가 남겨질 딸에게 주기 위해 계속 서서 그림을 그린다거나, 인생을 돌아보며 자서전을 쓰거나, 독서나 뜨개질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영상 편지를 남기거나, 유산을 정리하기도 한다. 미리 준비해 놓는다면 죽음에 가까워질 때 그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후회를 최대한 줄여 남은 시간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문득 급사로 죽고 싶다고 하시던 어느 호스피스 교수님이 떠올랐다. 비록 준비를 미처 못한 가족들은 후회가 남을 수 있겠지만 아픈 상태가 지속되어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것보다 급사가 나을 것 같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것도 본질은 주변에 짐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지, 죽음을 준비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미리 준비할 수 있다면 준비해 두고 고통 없이 한순간에 죽고 싶다고 하셨다. 무엇이 더 나은지에 대한 답은 없다. 


OECD 국가 중에서 죽음의 질이 가장 높은 영국은 집에서 임종하는 것을 장려해서 말기 환자가 불필요하게 응급실에 오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노력한다. 응급실에 오더라도 말기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처치도 없거니와 불필요한 검사를 하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영국에서 만난 30대 완화의료 전문의 J는 당신의 장례식 때 틀어놓을 음악을 이미 정해놓았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나이 어린 손주나 자녀에게 죽음에 대해 설명하며 자연스러운 대화를 한다고 했다. 먹는 양이 줄어들고, 자는 시간이 늘어나며, 호흡 수가 줄어들고, 헐떡 호흡을 보이는 등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이를 미리 교육해서 환자와 가족이 덜 불안해하고 불필요하게 응급실에 오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이렇게 준비된 죽음을 위해서는 환자와 가족, 의료진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나답게 살다가 나답게 죽는 것이다. 극심한 통증이나 치매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라면 나다움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캐나다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스스로 사는 것에 의미가 없다고 느끼거나 품위가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증상을 조사했는데, 가장 많이 응답한 것이 대소변을 스스로 가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신체 정신적 증상이 기본적으로 조절되어야 비로소 온전하게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증상 조절 다음으로는, 환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지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한 뒤에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생애 말기 환자도 호불호가 있고 원하는 것이 명확하다. 어린 말기 환자도 마찬가지이다. 소아 말기 환자에게 현재 상태를 숨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히려 아이를 소외시키는 것이다. 어리더라도 자신의 삶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자신이 왕년에 잘 나가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벌어놓은 돈을 이고 지고 갈 수도 없고, 따놓은 학위증을 갖고 죽을 수도 없다. 죽음 앞에서는 철저하게 내면의 나다움만 남게 된다. 그렇기에 나다운 것, 즉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중요하다. 일본의 H호스피스에서 만난 어느 할아버지는 당신 스스로를 내게 소개할 때 왕년에 잘 나가던 스키선수라고 소개하셨다. 그리고 계속 스키 타던 시절 이야기를 하셨다. 어느 해에는 로키 산맥에서 스키 대회를 나갔고, 어느 해에는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기도 했다고 하셨다. ‘그때 좋았지…’만 곱씹던 할아버지의 눈은 나를 향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그 너머 과거의 당신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키를 타지 못하고 몸져누워 있는 어느 시점부터 그는 자기답지 못하다는 생각에 자꾸 과거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죽음 앞에서 남게 될 오롯한 나다움은 무엇일까. 의사라는 직업? 부모님의 딸이라는 관계? 호기심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기질? 나답게 만드는 것은 한 요소가 아니라 여러 요소일 것이다. 어느 호스피스 의사분께서는 인터뷰에서 ‘환자들이 치료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의 마지막을 환자로서 살고 싶지 않아서.‘라고 하셨다. 가정으로 돌아가서 엄마로서 마지막까지 살고 싶어서 치료를 그만둔 환자가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무엇이 나의 정체성인지는 더욱 다양해질 것이고 살아가면서 평생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엔딩이다. 스토리를 잘 쓰기 위해서는 엔딩을 염두에 두면서 서사를 전개해야 한다. 스토리의 총합이라 볼 수 있는 삶에서도 아름다운 마무리가 중요하다. 멋진 마무리를 위해서는 엔딩 자체를 어떻게 할지도 계속 떠올려보지만, 엔딩을 향해 가는 스토리의 과정도 멋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을 후회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을 상상해 보며 그 과정인 삶 또한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좋은 삶은 좋은 죽음을 떠올려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오히려 일직선에 놓여있다. 그래서일까. 잘 죽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다 보니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죽음을 배우면 삶이 달라진다. 지금 집 밖에 잠시 나간 길에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죽음의 형태를 예측할 수 없지만, 어떤 형태의 죽음이든 후회가 없으려면 결국 살아있을 때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내게 잘 죽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어떤 형태로 죽든 간에 죽는 순간에 ‘난 최선을 다해 살았다.’라고 할 수 있으면 그것이 잘 죽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래서 잘 죽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잘 살았다고 스스로에게 당당하려면 ‘나답게’ 살아야 한다. 남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꼭 그것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라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에 기여하고 내가 사회에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잘 산 것이다. 


이 글의 처음에 어떻게 죽고 싶은지 상상해 보자고 했다. 그 상상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와닿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선택할 수는 없다. 마지막까지 치매는 걸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든지, 자다가 편안하게 죽었으면 좋겠다든지 하는 바람은 쓸모없는 상상일지 모른다. 이에 대해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 선생님은 책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에서 죽음의 상황을 바라기보다 마지막 숨을 쉴 때 무엇을 마음에 떠올릴지를 생각해 보라고 권하셨다. 나는 마지막에 무엇을 떠올릴까.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 나오는 시구를 응용하자면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떠올릴 수 있길 바라본다.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전 08화 통증에서 나아가 고통을 이해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