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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Mar 30. 2024

죽어가는 중? 살아가는 중!

일본 H 호스피스 병원에서 참관할 때 루게릭 병 아주머니 환자분을 만났다. 그분께서 곧 퇴원 예정이셔서 퇴원하기 전에 병동에서도 뵙고 환자분 댁으로 같이 퇴원해서 가정 돌봄을 받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루게릭 병은 스티븐 호킹 박사도 앓았던 병으로, 정신은 온전한데 전신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다가 수년 뒤에는 결국 호흡 근육이 마비되어 사망한다. 원인도 명확하지 않고 완치방법도 없어서 진단 후 사망까지 마비로 인해 생기는 소화불량, 호흡곤란 같은 증상을 의학적으로 조절하게 된다. 루게릭 환자를 직접 뵙는 건 처음이었다. 그분은 모니터가 달린 특수한 전동 휠체어에 파묻혀 힘없는 연체동물처럼 몸을 기댄 자세로 주로 생활하셨다. 호흡 곤란 때문에 기관절개관을 하고 계셨고, 삼키는 근육도 약해져서 음식을 입으로 드시지 못하고 배에 관을 꽂아 영양을 공급받고 계셨다. 혼자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서 24시간 돌보미가 상주하며 케어하는데, 몇 년 동안 이 환자분만 담당하는 돌보미 두 명이 돌아가며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다. 기관절개 상태라 목소리를 내지 못해서 그나마 힘이 약간 남아있는 허벅지에 조이스틱을 끼워 천천히 모니터에 나타난 키보드를 보며 한 음절 한 음절 입력해서 의사소통 하신다. 당연히 한 단어를 입력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루게릭 병 진단 당시에 직업이 있었는지, 결혼은 한 상태였는지, 진단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진단 이후 가족은 어떤 반응이었는지, 진단 전후로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가치관과 성격에 변화가 있었는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여쭤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런데 허벅지로 힘겹게 한글자한글자를 입력하는 것이 너무 벅차 보여서 거의 여쭤보지 못했다. 환자분께서 힘겹게 자판을 쳐서 말씀하신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신께서 하고 싶은 말의 1/10도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24시간 내내 자기만의 시간 없이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하는 삶,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온몸이 마비되어 말도 잘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삶, 정신은 온전한데 점점 마비가 심해져서 결국 숨을 못 쉬어 죽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살아가는 삶. 처음에 병원에서 그 환자분의 의학적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그분이 자기다움을 잃어서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계실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죽고 싶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환자분을 직접 뵙고 환자분 댁에도 찾아가 보니 내가 참 오만하게 지레짐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퇴원을 앞두고 집에 오랜만에 간다며 환자분은 온 얼굴로 기뻐하고 설레하셨다. 입원해 있는 동안 계절이 봄으로 바뀌어서 집 현관에 겨울에 두었던 목화를 벚꽃으로 바꿀 거라고 하셨다. 그날그날 입고 싶은 옷을 직접 고르시고 인테리어 소품도 하나하나 손수 골라 배치하시고 오늘 식사 메뉴도 고민해서 정하셨다. 당신께서 직접 못하셔서 도우미분께 매번 부탁하는 것이 눈치 보일 법도 한데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셨다. 환자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그 집 곳곳에서 그 분만의 색깔이 물씬 느껴져서 마치 온몸과 물건으로 당신이 살아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계셨다.


환자분 댁에서 가정방문 간호사가 기관절개관과 배에 꽂힌 영양공급관을 소독했다. 소독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문득 환자분께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눈빛을 느꼈다. 환자분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의 내 표정이 신경 쓰였다. 행여나 동물원의 동물을 보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환자분을 보고 있진 않았나 싶어 얼른 표정을 고치려고 했는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얼굴 근육 하나하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환자분은 눈빛으로 많은 걸 읽어내려고 하시고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환자분께서 오히려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뜯어보고 있단 걸 알았다. 환자분을 나보다 나약한 존재로 보고 나만 환자분을 관찰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죽어가는 중이므로 우울하고 연약하고 삶을 즐기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이 내게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불치병에 걸려도 다른 사람에게 호기심을 갖고 소통하고, 하고 싶은 것이 많고, 설레기도 한다.


그분을 보면서 말기 진단은 사형 선고가 아니라 어쩌면 새로운 시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과정을 어쩔 수 없는 상실감과 슬픔뿐만 아니라 사랑과 설렘, 나눔과 친절 같은 따스함으로 채워 갈 수 있다. 숨을 쉬는 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하던 일을 죽기 전까지 계속할 수 있다. 생애 말기는 죽을 일만 남은 상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눈빛을 주고받고, 대화를 나누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태이다. 여전히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을 준비하고 배우는 능동적인 시기이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다. 아기가 처음 삶을 시작하고 걸음마를 배울 때 부모와 사랑을 주고받으며 용기를 갖고 수없이 일어서고 넘어지며 배우듯, 삶의 마지막인 죽음 또한 다른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용기를 갖고 배우는 것이 아닐까. 퇴원하고 오랜만에 집에 간다는 설렘과 새로운 사람을 향한 호기심, 낯선 외국 의대생에게 기꺼이 베푸는 친절. 생애 마지막까지 겸손하면서도 용감하게 한걸음 한걸음 삶을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루게릭 아주머니 환자분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그 분과 시간을 보내며 내가 많은 걸 느끼고 영향을 받은 것도 모두 그분께서 여전히 주변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덕분이다. 루게릭 병 환자를 만나기 전의 나처럼 불치병이나 말기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이제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인 결말을 읽지도 않고 삶을 다 안다고 아는 척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기 환자도 여전히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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