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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Mar 19. 2024

이별할 용기(Courage to Leave)


영국 런던에 있는 R 호스피스에서 2주 동안 실습하면서 가정 방문 호스피스에 자주 참여했다. 병동보다 가정에서 환자분을 뵐 때 환자분들도 더 편안해하시고, 집을 둘러보며 환자분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환자분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환자분께 직접 듣는 이야기가 가장 날 것 그대로이고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이야기이므로 최대한 환자분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했다. 가정 방문 호스피스의 경우, 평소에는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선생님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환자 상태가 바뀌어서 진료가 필요하면 호스피스 의사가 왕진을 간다. 방문 주기는 환자 상태에 따라 다른데 2-3주일에 한두 번씩은 가고, 중간에 언제든 환자가 전화로 진료를 요청할 수 있다. 


하루는 런던에 살고 계시는 96세 말기암 할아버지 환자분을 방문했다. 그날은 2주 동안의 영국 실습이 끝나는 날이기도 했고, 일본에서 영국으로 이어진 6주간 해외 실습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익숙해진 출퇴근 길도 달라 보였고, 이곳의 모습을 되도록 눈에 많이 담아 가고 싶었다. 실습도 후회 없이 마무리하고 싶어서 평소보다 더 많이 느끼고 배우려고 했다.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환자분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걱정이 한가득이셨다. 오늘 할아버지를 뵈면 이제 집보다 요양원으로 옮기시는 게 낫겠다고 말씀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도 한 번 요양원 이야기를 꺼냈는데 강력하게 거부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환자분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어서 집에서 가족들이 돌보기 어려워지다 보니 다시 한번 요양원을 권하려고 한다셨다. 싫다고 하시면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이라며 무거운 마음으로 같이 초인종을 눌렀다. 따님과 까만 리트리버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거실로 안내받아 들어가는데 따님 표정이 좋지 않아서 간호사 선생님이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알고 보니 그날 아침에 갑자기 혈변을 많이 보셨다고 한다. 이런 적이 처음이라 환자도 당황하고 가족도 당황하고 오전 내내 혈변 처리를 하느라 정신없다가 다 마무리되었을 때 마침 우리가 왕진 온 것이라고 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간호사 선생님은 환자 상태에 대해 묻고는 조심스럽게 딸의 안색을 살피며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딸은 갑작스러운 혈변 뒤처리를 하느라 정신없었다가 그 말을 듣고는 이제야 울음을 터뜨렸다. 이대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며 너무 무서웠다고. 간호사 선생님은 딸을 가만히 안아주셨다. 


2층에 계신 할아버지를 뵈러 계단을 올라갔다. 1층 거실에서 2층으로 올라가며 집을 둘러보았다. 흑백 벽걸이 사진들, 누렇게 변한 책, 젊은 시절의 가족사진, 삐걱삐걱 소리 나는 계단, 해어진 카펫, 손때 묻은 가구들, 오래되어 보이는 벽지, 계단 난간 틈에 두껍게 낀 먼지, 쿰쿰한 냄새. 곳곳에 할아버지께서 살아오신 흔적이 쌓여있었다. 할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신문을 보시다가 우릴 보시고는 신문을 내려놓으셨다. 오늘 갑자기 혈변을 많이 보셔서 놀라셨겠다며 간호사 선생님이 할아버지 상태를 물어보셨다. 아무런 전조증상 없이 갑자기 소변보듯이 혈변을 보셨다고 했다. 다행히 혈변을 보시기 전이나 후에 통증도 없었고 다른 불편감도 없었다. 소변인지 대변인지도 나중에 뒤처리를 하면서야 아셨다고 했다. 혈변 이야기를 얼추 마무리 짓고 간호사 선생님은 요양원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나도 덩달아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할아버지께서 흔쾌히 더 이야기해 보자고 하셨다. 안 그래도 당신께서도 이제 요양원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셨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중한 사람들과 의미 있게 보내고 싶은데 악화되는 증상에 불안해하고 증상 뒤처리만 하다가 시간이 다 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모두 안도하며 부드럽게 대화가 진행되었다. 딸이 미리 알아본 요양원이 마침 간호사 선생님이 추천하려는 요양원과 같았고, 요양원이 집과 가까운 데다, 의료진도 친절하고, 시설도 좋고, 애완동물도 출입이 자유로운 곳이라 할아버지께서도 만족스러워하셨다. 


하지만 이렇게 부드럽게 술술 풀리는 대화가 내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요양원을 찾았다고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요양원으로 가시면 이제 할아버지는 평생 살아온 흔적이 있는 이 집에 다시 못 오실 수도 있다. 예전에 요양원을 권유받았을 때 거절하신 이유에는 아마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 않았을까. 할아버지께서 요양원으로 가시겠다는 그 결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날이 내게 런던 실습 마지막 날이어서 더 이입이 되었을 수도 있다. 런던에서 2주 동안 매일 다니던 출퇴근길, 그동안 지내던 아늑한 3층 다락방, 새벽에 창문에 부딪히던 빗소리, 잦은 비에 질척거려 불평했던 진흙길, 퇴근길에 들러 엽서도 쓰고 혼자 저녁도 먹었던 지중해식 레스토랑, 런던 공항에 내리자마자 들려서 설레었던 영국 악센트, 기념품 삼아 실습병원 앞에 책을 사러 들어갔다가 서점 주인의 취향이 흠뻑 묻어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한참 둘러보았던 서점까지.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달리 보였다. 고작 2주 머문 곳에서 떠날 때에도 이렇게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이고 아쉬운데 몇십 년을 사셨을 이 집을 떠나겠다고 결정할 때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요양원으로 옮기실 즈음이면 나는 한국에 돌아왔을 때겠지만 그때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비단 집뿐일까. 죽음을 앞두면 세상 모든 것과 이별할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집, 가족, 친구들, 반려동물, 길거리, 햇빛, 음식, 손때 묻은 물건, 추억. 내 생활을 이루던 소소한 부분들의 무게가 죽음의 비가역성 앞에서는 한없이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할아버지 스스로 당신의 마지막 거처를 결정하고 기꺼이 이별의 아픔까지도 감내하고 받아들이시는 모습에서 용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곁을 든든하게 지킨 가족과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계셨기에 할아버지께서도 용기를 내실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용기를 내어 스스로 마지막 거취를 결정하고 익숙한 환경과 이별하기로 결심하는 것도 어느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말기 환자의 내적 성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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