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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Mar 09. 2024

사람은 이렇게 죽어가는 거란다

"This is how a human dies, dear."

영국 런던 가정방문 호스피스에서 한 환자분을 뵈었는데 그분은 내게 웰다잉의 롤모델이 되셨다. 93세 말기암 할머니셨다. 차를 타고 할머니댁에 가는 길에 같이 가던 가정방문 의사분께서 간단히 환자 소개를 해주셨다. 폐암이 있었는데 다발 전이가 생겼고 심부전과 신부전까지 있다고 했다. 현재 주 호소는 환시와 설사라고 했다. 60대 아들 세 분이 돌아가며 할머니댁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고 했다. 93세에 말기암에다 장기부전까지 있다고 하니 침대에 누워 힘없이 계실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댁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눌렀다. 집 저 안쪽에서부터 달달달달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퀴소리가 현관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삐걱거리며 문이 열렸다. 백발의 할머니께서 보행기를 잡은 채 우리를 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너무 정정하셔서 당황했다. 말기 환자는 병약하게 침대에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 편견이었구나. 


할머니께서는 밤마다 보이는 것이 환시라는 것을 자각할 만큼 당신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다. 의사 선생님과 대화 중에 할머니께서는 ‘저는 죽어가는 단계잖아요’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그 담담함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지금 쓰는 약 하나하나에 대해 이 약은 왜 먹는 것이고, 언제 먹는 것인지, 끊으면 안 되는 것인지 관심을 갖고 의사에게 직접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수전증 때문에 떨리는 손으로 메모까지 하셨다. 정리해서 처방전으로 드린다고 해도 ‘아까 그 약 다시 말해줄래요?’하며 꼼꼼하게 메모하셨다. 상황을 파악한 후 스스로 모든 결정을 하셨다. 그 정도 연세와 몸 상태라면 약물이 헷갈리고, 이런저런 설명을 모두 이해한 후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머리 아프니 아들에게 결정을 맡길 법도 한데 할머니는 꼿꼿하셨다. 불편하신 게 있는지 여쭈니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소에는 매일 일정한 시각에 변을 보는데 대변 완화제를 먹으면서는 언제 변이 나올지 몰라요. 그리고 변의가 느껴지면 참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친구가 와 있을 때도 있다 보니까 곤란해지는 게 싫어요.” 

아하, 학교에서는 그저 ‘변비에 쓰는 약은 무엇 무엇이 있다’ 고만 배웠는데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는 환자 분은 이런 불편함을 느끼실 수 있겠구나. 


지금 복용 중인 약과 남은 약을 확인하려고 가정방문 의사와 아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할머니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할머니께서 먼저 말씀을 걸어오셨다. 요즘 세계사 책을 읽는데 이집트 문명이 참 재미있더라며 바로 옆 책상에 있던 책을 펴서 보여주셨다. 여생이 몇 달 남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책을 읽고 호기심을 느끼는 여유라니. 입장을 바꾸어서 몇 달 뒤에 죽으리란 걸 안다면 나는 과연 책을 읽으며 심지어 참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책 이야기에 이어서 할머니는 눈을 반짝이시며 내게 질문을 해오셨다. 처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냐고. 그래서 중학생 때 꿈은 외교관이었다고 하니 할머니께서 당신의 전 남자친구가 외교관이었다고 하셨다. 오늘 처음 본 외국 의대생인 내게 아무렇지 않게 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시는 할머니의 소녀 같은 순수함과 소탈함에 웃음이 났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할머니는 인자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내게 This is how a human dies, dear.(사람은 이렇게 죽어가는 거란다)라고 하셨다.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까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인 할머니의 평화로움이 전해져 여운이 오래 남았다. 마지막 인사로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고 하니 ‘Happy future.’라고 웃으며 인사해 주셨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듣는 축복이라. 마치 인생 선배로서 ‘나는 참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지. 너도 앞으로 그럴 거란다.’라고 토닥여 주시는 것 같았다. 그저 으레 하는 인사말이기도 하지만, 지난 삶에 불만과 억울함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죽음을 앞에 두고서 다른 사람에게 웃으며 할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끝까지 당신답게 살고자 하는 할머니의 노력을 볼 수 있었다. 그 노력을 통해 죽음을 앞에 두고도 변함없이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용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고집스럽다 느껴질 정도로 모든 사소한 결정까지 스스로 하시고 주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통해 마지막까지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말기 환자를 만나면서 같이 웃는다거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만남의 시작부터 끝까지 반전을 보여주신 할머니셨다. 지금은 아마 세상을 떠나셨을 테지만 할머니께서 전해주신 울림은 오래도록 내게 남아서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나 또한 할머니와 같은 여유와 편안함을 느끼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곧 나답게 죽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배웠다. 삶과 죽음은 이어져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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