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y Gwon Mar 07. 2024

프롤로그: 병원의 볼드모트

병원은 죽음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죽음을 회피한다. 환자든 의사든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고, 남자 의사에게 검은 넥타이도 못하게 하고, 죽을 사(死)를 떠올리게 하는 4층이나 444호 병실은 없다. 매일 심폐소생술 방송이 울리고 병색이 완연한 환자들이 가득한 병원에서 다들 죽음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약속이나 한 듯이 죽음 따윈 없는 척을 한다. 소설 해리포터에서 모두 두려워하며 이름조차 감히 입에 담지 못하던 볼드모트가 병원에도 있는 셈이다. 


그래, 일반인인 환자는 죽음이 두렵고 피하고 싶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환자를 품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유하자면, 아이가 혼자 자는 것이 무섭다고 엉엉 울 때, 엄마도 무섭다며 같이 엉엉 울면 아이의 불안은 극대화될 것이다. 엄마가 아이의 두려움을 품어주고 혼자 자는 것은 어른이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부드럽게 알려주면서 혼자 잘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지 않은가. 


죽음을 피하지 않고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것, 환자를 돌보는 의사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다. 그런데 의대에서 어떻게 하면 환자를 살리는가에 대해서는 줄곧 배우면서 어떻게 하면 환자가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 의대 입학 전에 나는 한의사였다. 한의대를 졸업하고 한방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수련을 거쳐 전문의가 된 직후 의대에 들어왔다. 한의대를 다닐 때에도, 한방병원 수련 과정에서도 죽음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고 죽음이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피해야 할 두려운 존재였다. 


의대 입학 전 한방병원에서 수련받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인턴 때 처음으로 내 환자분이 돌아가셨다. 처음 맡았을 때부터 의식이 없었고 콧구멍, 목, 팔, 옆구리, 요도에 온갖 줄이 꽂혀 있었다. 관이 꽂힌 부위 소독을 매일 두 번씩 하느라 환자를 자주 만났고, 보호자인 딸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환자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는데 어느 날 주치의가 내게 환자분이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다. 심장이 멈추더라도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이미 보호자인 딸에게서 받은 상태여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몇 시간 후 심전도가 평평해지자 주치의가 사망선고를 내렸고 나는 환자 몸에 꽂혀 있던 온갖 줄을 하나씩 뽑았다. 그리고 관이 꽂혀 있던 자리를 한 땀 한 땀 꿰맸다. 온갖 관이 참 많이도, 깊게도 꽂혀있었다. 의식이 없으셨지만 몸이 힘드셨겠구나,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겠구나 싶었다. 정리하는 동안 환자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해부 학생 실습 때는 시신이 이미 차가워진 상태에다가 얼굴도 모르던 사람이었지만, 이 환자는 익숙한 얼굴이었고 따뜻하던 몸이 식어가는 것이라 느낌이 너무 달랐다. 진짜 죽음이구나. 다음날 그 환자가 있던 병실 자리에 다른 환자가 들어와 있었다. 한동안 그 병실 앞을 지나가며 그 환자가 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박혔다. 


이후 레지던트가 되어 병동 주치의를 맡았을 때 내 환자가 조금이라도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면 난 불안해졌다. 통증 환자를 주로 맡았는데 여기저기 아파하는 노인 환자분들은 넋두리처럼 ‘아유 인제 그만 죽어야지.’ 하셨다. 그 말에 너스레를 떨면서 '증손주도 보고 오래오래 사셔야죠, 별말씀을 다하신다'든지 아니면 그분들의 죽음에 대한 불안에 귀 기울였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환자들의 불안을 안아주기에는 의사인 내가 갖고 있는 불안이 컸다. 그래서 환자들이 죽음 이야기를 내게 꺼내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새벽부터 나와서 환자분 어떻게 하면 낫게 해 드릴지 고민하는 주치의한테 그런 말씀하시면 어떡해요.’라고 대꾸했다. 못났다. 그때 그 말을 하면서도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달리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넉넉하게 그분들의 두려움을 받아내기엔 내 마음속에 두려움이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성숙한 주치의가 되어 환자의 두려움을 보듬어 주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했다.  그때부터 건강한 죽음관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자리 잡았다. 죽음을 앞두면 어떤 마음이 들까? 누구나 죽는데 이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 좋은 죽음은 무엇일까?


좋은 죽음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말기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낫지 않는 극심한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 자식에게 짐이 될까 봐 걱정하는 노인,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으로 고통받는 조현병 환자 등 여러 분야에서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건강한 죽음관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나 좋은 죽음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동안의 의대 교육과 병원 수련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박함을 헤아릴 통찰력을 배우지 못했다. 이것을 안 후부터 건강한 죽음, 즉 웰다잉(Well–dying)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예비 의사로서 죽음에 대해 환자와 보다 성숙한 대화를 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을 고민해 보았다. 환자가 죽음을 두려워할 때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이해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 환자가 솔직하게 불안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넓은 마음 그릇을 갖추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웰다잉에 대한 건강한 인식을 배우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학생 때에는 본과 3-4학년에 걸쳐 해외실습과 인문학 과정에서 6주 동안 일본과 영국에서 정신종양학과 완화의료 실습을 했고, 국내외 교수님들께 웰다잉을 주제로 인터뷰해서 보고서로 썼다. 그 외에도 본과 2학년 선택 과정으로 ‘의대생을 위한 죽음학 수업’을 듣기도 하고, 평소에는 빅터 프랭클, 어빈 얄롬, 알베르 카뮈 등과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가 쓴 책을 읽으며 웰다잉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의사인 나의 불안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고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인지에 대한 건강한 가치관을 점차 배울 수 있었다. 이 글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이 답을 찾는 과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나의 여정을 나누기 위해 썼다. 평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으셨던 분들도 이 책을 읽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실 수 있길 바란다. 초보 의사라 서툴겠지만 그 또한 누군가의 시행착오를 줄여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써내려 갔다. 제 다듬어지지 않은 울퉁불퉁함에 불편함을 느끼실 수 있어 미리 양해를 구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