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아가, 난 네가 있어서 행복해

지독했던 나의 번아웃과 산후우울증을 가져간 작은 너라는 존재

by 애플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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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과 나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

각자의 일 때문에 일 년 이상 각자의 나라에 떨어져 살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내가 네덜란드에 오면서 본격적으로 한집에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낯선 네덜란드에 와서 살기보다는 한국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네덜란드로 이주하기 전 내가 남편보다 더 돈 잘 버는 직장을 찾아서

남편을 한국으로 데려와 같이 살고 싶었지만...

솔직히 실패했다.


대신 내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던 남편이 있는 네덜란드로 오게 되었다.


나처럼 네덜란드인과 결혼 혹은 동거의 이유로

여기에 와서 사는 비 EU권 국적의 외국인들은 전부 3년 안에

악명 높은 네덜란드어 시험(Inburgering examen)을 통과해야만 한다.

만약 통과하지 못하면 그때 당시의 기준으로는 첫 해에는 1800유로(현재 환율 기준 240만 원)의 벌금을 내야 했고 그래도 통과를 못 한다면 그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통과할 때까지 매해 벌금을 내야 했다.

(다행히도(?) 벌금의 액수는 매해 점점 적어진다.)


나는 남편 하고는 만났을 때부터 계속 영어로 대화했었기에

그 당시의 나의 네덜란드어 수준은 딱 2글자 밖에 몰랐던 상태였다.

Ik ( 나), mooi(아름답다.)

그런데 당장 A2 수준인 듣기, 말하기, 쓰기, 읽기, 역사와 문화, 직업 포트폴리오와 인터뷰 테스트

등 이 모든 시험들을 네덜란드어로 수업을 듣고 통과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나는 결혼하고도 1년 이상의 기간을 한국에서 허비(?)했기에

남은 시간은 1년 반 정도였고

결국 네덜란드 정부에서 편지(독촉장)를 내게 보내면서 압박을 주었다.

"J 님, 네덜란드어 시험 준비 잘 돼가시나요?
남은 기간은 이제 2년도 안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통과 못 하시면 통과하실 때까지 매년 벌금을 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남은 2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그 네덜란드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한국에서 하던 애니메이션 프로젝트가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서둘러 네덜란드에 오게 되었다.

오기 전 부랴부랴 외장하드를 구입해 작업 파일들을 전부 넣어 소중하게 들고 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당시 함께 작업했던 팀원 분들 중 몇 분들에게 비록 서로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더라도

원격으로라도 작업해서 결과물을 내자고 부탁을 드리고 왔다.


당시에 내가 한국에서 하던 일은

TV 애니메이션 파일럿 애니메이션의 국가 지원금을 받아 기획, 제작까지 마무리 지어야 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나는 포지션이 그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이자 감독이었다.

애니메이션 작업은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제작하는데 시간과 노력이 정말 많이 걸린다.

그래서 당연히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했었는데

모든 것을 조율하고 결정하는 것은 전부 현장에 있었던 나의 몫이었다.

밤늦게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은 당연했고 주말에도 출근했다.


그 상황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제작사 문제였다.

내가 국가에서 받았던 지원금을 가지고 외주 작업을 계약했던 제작사 내부에서 큰 문제가 생겨

내 작업을 도와주지 못하였고

그래서 감독인 내가 직접 매일 제작사로 출근을 해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완수해야 했다.


가끔 일하는 모니터 건너편에서 고성이 오가고 수시로 문제가 터져 나오는 제작사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비용 문제를 챙기고 부탁하고 달래주며

현장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고작 나라는 사람 하나였기에

내가 어떤 몸과 마음의 건강 상태를 가지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사실 자각했어도 그때 당시에는 달라질 것은 없었겠지만)

그저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기 위해 앞으로만 전진했었다.



제작사의 상황 때문에

원래 책임을 져야 했던 사람들보다 나는 아주 많은 책임을 떠안게 되었고

점차 일을 하러 컴퓨터나 책상 앞에 앉으면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일부러 의식적으로라도 한숨을 쉬며 숨을 쉬었다.

안 그러면 숨을 쉬지 못해 책상에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촉박했고 프로젝트는 기간 내에 마무리되어야 했기에

이런 내 상태는 그냥 외면한 채 매일 강행군을 했다.


많은 압박 속에서 진행된 프로젝트 막바지 무렵

내게 번아웃이 심하게 왔을 때는

공황장애와 백지 공포증까지 생겨

하얀 종이가 앞에 놓여 있어도 아무것도 못 그리게 되었다.

그때는 선하나 긋는 것도 힘들어서

억지로라도 초콜릿이나 과자 등 정크푸드를 먹으면서 해야 겨우 그릴 수 있었다.



거기다가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으며 동시에

2년 채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어 시험도 통과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로젝트는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네덜란드어 시험도 전부 통과하였다.


하지만

내 몸과 정신을 갈아 넣었던 총 3년 정도의 프로젝트 기간과

짧았던 네덜란드어 시험 준비 기간은

결국 나에게 번아웃과 백지 공포증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나는 프로젝트와 시험을 마무리한 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 하게 된 강의 일 등을 하며 내 그림은 그리지 않은 채 밖으로 자주 나돌았다.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나는 앞으로 뭘 하며 살 수 있을까?

그때는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지내다가

나의 소중한 첫 아이, 애플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애플이가 나에게 온 이후로

나는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순간들과 감정들을

기록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임신했을 때부터 육아 일기를 쓰면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은

하나씩 하나씩 서툴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마치 재활훈련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내 감정들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다 하다 보니

번아웃과 백지 공포증은 서서히 잊혔다.

그림을 그리기 힘들 때에는 애플이를 그리거나

애플이와 있었던 행복한 순간들을 그리면서

점차 그림 그리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다가 애플이를 낳은 후 타지에서 혼자 독박 육아를 하며

산후 우울증과 향수병이 왔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해

출산 6개월 만에 내 인생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인터넷에 그림을 그려 올리며 사람들과 소통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정말 애플이 덕분에 다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동기 덕분인지 아이러니하게도 새롭게 올리는 그림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심지어 위로도 받는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내 현재의 작업 스타일에는 임신, 출산, 육아가 정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육아를 하다 보면 작업을 할 시간과 체력은 항상 부족하지만 아가 덕분에 그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또 다른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내게는 출산과 육아가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애플이를 낳기 전에는 시간은 지금보다 여유로웠어도 그리고 싶은 것이 전혀 없었으므로...(미안해 남편)

내게 애플이가 없었으면 난 아마 지금까지도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것 같다.

결국 어둠 속에 웅크리고만 있던 나를 이끌어 빛이 쏟아지는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힘인 것 같다.


어둠 속에 있던 나의 손을 잡아줘서 고마워. 나의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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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상황들이나 내 감정들을 그림 일기식으로 러프하게 그린 육아 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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